헷갈리는 국가정책 우선 순위

전제(前提)는 이렇다. 지금은 흘러간 과거사 들추기에 ‘올인’ 할 때가 아니다.
시대 상황은 그렇게 한가하지가 않다. 국가정책의 우선 순위는 과거사 정리가 아니다.
먹고사는 문제가 최우선 과제다. 지금 백성들은 못살겠다고 아우성이다. 생계형 범죄가 활개를 치고 가난에 지쳐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비극이 이어지고 있다.

그래서 과거사에 매달리기보다는 죽어 가는 경제를 회생시키는 데 몰입할 때다.
정치권이 아무리 ‘아니’라고 억지를 부려도 정략적 의도가 게재된 것 같은 과거사 파헤치기나 개혁으로 포장된 이분법적 편가르기 식으로는 게거품 물고 바동거리는 경제를 살릴 수는 없다.

지금 사회는 야만의 광기가 휘몰아치는 포퓰리즘에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네 편은 모두가 적이고 타기(唾棄)해야 할 대상이며 내 편은 단지 내편이라는 이유하나만으로 모든 허물이 미화되고 덮어지기 일 쑤다.

“삶이 죽음보다 더 고통스럽다”는 젊은 실업자들의 신음소리가 절박하게 들려오는 데도 사회는 이처럼 찢겨지며 분화되고 있다.

설익은 과거사 들추기는 위험

시대 상황이 이처럼 어려운데도 정치 담당자들은 똘똘 뭉쳐 과거사 편식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물론 잘못된 역사는 바로 잡아야 한다. 그래야 역사가 발전한다.
“역사의 경험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면 미래는 없다”는 역사 인식은 지금도 유효한 보편적 진리일 수밖에 없다.

중국의 주자(朱子)도 “역사가 길을 잃어버리게 되면 민족과 국가도 길을 잃고 헤매게 된다”고 경고하지 않았던가.
그러기에 ‘역사 바로 세우기’에 딴 죽 걸 사람은 드물 것이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역사 파헤치기’ 시시비비로 모든 에너지를 고갈시켜버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역사 바로 세우기의 당위가 인정된다고 해도 역사적 사실이 갖는 엄숙함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역사의 시대정신을 읽어내는 분별력을 잃어버려서도 곤란하다.
이것이 역사가 요구하는 지혜다. 역사의 지혜는 “과오(過誤)는 처절한 자기 반성의 교훈으로 삼고 공적(功績)은 빛나는 미래의 디딤돌로 다듬자”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정신의 껍질만 보고 본질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설익은 과거사 들추기는 위험하다. 만에 하나 잘못됐을 때는 역사는 뒷걸음치고 그것은 부메랑이 되어 새로운 응징의 대상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정치적 의도 의심” 우려 목소리

또 있다. 백 번 이해해서 ‘굴절된 과거사 정리’가 참여정부의 절박한 개혁과제이고 짊어지고 갈 수밖에 없는 멍에라 하더라도 그 주체는 정권이나 정치권이 되어선 안 된다.
역사인식의 편향성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몇 세대가 지난 근대사를 ‘5년 단임 정권’이 다시 쓰겠다고 나서는 것은 그래서 역사에 대한 오만이며 독선이 될 수도 있다.
과거사 정리가 50년 전 또는 100년 전 역사를 무덤에서 파헤쳐 정치적 목적을 위해 부관참시(剖棺斬屍)하겠다는 의도가 아니라면 그 작업은 정부나 정치권이 아닌 역사학자 등 중립적인 학계의 몫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과거사 정리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는 시점이다.
“친일파의 공과(功過)를 따져 역사를 바로 세우자는 것이 아니라 친일파 자녀나 자손을 찾아내 그의 가슴에 ‘주홍글씨’를 새기고 사회적 증오의 대상으로 삼으려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도 여기에 속한다.

따라서 과거사 문제는 학계나 역사에 맡기고 정부와 정치권은 무익한 소모전에서 벗어나야 한다. 여야 모두 정쟁을 멈추고 경제 살리기에 떨쳐 일어나야 할 것이다.
정치권에 보내는 백성들의 주문은 그래서 절박하다.
“언제까지 흘러간 역사의 물레방아를 되돌리려는데 국민적 에너지를 소진시킬 것인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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