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을 잘 차려입은 아름다운 여인이 어느 집을 찾아왔다. 집 주인이 그녀에게 누구인가를 물었더니 그녀는 자신은 부(富)의 여신이라고 대답했다. 주인은 기뻐하며 그녀를 잘 대접했다. 곧 이어 옷을 초라하게 입은 못생긴 여인이 찾아왔다.

주인이 누구냐고 묻자 그녀는 가난(貧)의 여신이라고 대답했다. 주인은 깜짝 놀라 그녀를 집밖으로 쫓아내려했다. 그러자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부의 여신은 나의 언니예요. 우리는 서로 떨어져 살 수 없는 사이랍니다. 당신이 나를 쫓아낸다면 언니도 나와 함께 떠나야 합니다.”

 ▶ 그 못생긴 여인이 떠나자 과연 부의 여신도 사라졌다. 태어남은 죽음과 짝을 이루고, 좋은 일에는 나쁜 일이 따르기 마련이다.  이렇듯 6.25한국전쟁의 폐허 위에서 산업화를 이루기 위해 뛰던 1970년대에 인권이나 민주화 측면에는 늘 어두운 그림자가 따라다녔다.

 그로부터 30여년의 세월이 흘러 국민소득 2만 달러를 앞둔 우리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다. 낮은 성장과 경기침체가 장기화되고 치솟는 실업과 카드 빚 등으로 절대 빈곤층이 늘어나는 등 사회 양극화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평등한 세상에 대한 꿈을 파는 정치세력들이 그 틈새에 끼어들어 정치와 법적 수단을 통해 가진 자를 핍박하고 국부(國富)의 수평적 분배에 힘을 쏟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내세운 평등과 분배, 민주화, 과거사 바로세우기 등의 정치적 슬로건등은 생산과는 직접적으로 무관하다. 앞의 것을 강조하다보니 기업들은 이 땅을 떠나고 있고, 가진 자들은 각종 공적 부담을 버거워하며 새로운 사업을 회피하고 있다.

 ▶ ‘반보’란 은혜를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은혜란 누구든 도움을 받은 특정한 사람에게 보은한다는 뜻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타인의 힘, 세간의 힘을 몸에 받아 그 수혜덕분에 살아가고 있음을 뜻한다.

 진보세력들은 어떤 사회적 이슈가 제기될 때마다 연대(Solidarity)라는 이름으로 현실참여를 하고, 나아가 정치권력을 장악해 진보가 그리는 평등세계를 이 땅에 꽃피우기 위해 몸부림치지만 앞으로 무엇을 해서 어떻게 먹고살 것인가를 함께 고민하지 않는다. 지혜로운 사람은 생산의 반보가 분배이고, 보수의 반보가 진보임을 알기 때문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다.

[김승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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