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원에서

어여쁘게 생긴 이십대 처녀가 핸드폰을 자꾸 들여다본다.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수만큼 목을 빼어 공원입구도 자꾸 살핀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눈치다.

저렇게 간절히 기다리는 걸 보니 사랑하는 사람이겠구나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잘 생긴 총각이 처녀를 향해 헐레벌떡 뛰어 온다. 처녀가 무척 반가워하겠구나 싶었는데, 웬걸, 화를 벌컥 내며 소리를 꽥 지른다. 그 소리가 어찌나 큰지 저절로 귀에 와 박힌다.

“왜 이렇게 늦었어? 벌써 30분이나 지났잖아!”
쩔쩔 매는 총각. 계속 화만 내는 처녀. 결국 둘은 된통 싸워가며 공원을 나선다.

거리에서

한 젊은 엄마가 아이 셋을 데리고 횡단보도 앞에 서 있다. 큰아이가 일곱 살쯤? 그 밑으로 한두 살 터울인 듯한데, 세 아이 모두 가만히 서있지 않았다.

이리저리 팔을 휘젓고, 통통 뛰고, 금방이라도 찻길로 나아갈 몸짓이다. 한창 까불고 나댈 시기의 아이가 셋이라. 엄마가 참 힘들겠구나 생각하는 찰나, 그 엄마가 큰아이 등을 철썩! 소리가 나게 때리며 소리 질렀다.

“좀 가만히 있어! 아이구, 지겨워!”
아이는 깜짝 놀라 엄마 얼굴을 힐끗 보고 주춤했지만 잠깐이었다. 금세 또 통통거린다. 무얼 잘못했는지, 엄마가 왜 화를 내는지 모르는 눈치다. 엄마 얼굴에는 짜증이 잔뜩 묻어 있다.

음식점에서

사십 대 중반쯤 된 남자와 여자가 들어오더니 마주 앉았다. 남자가 종업원이 가져온 메뉴판을 보며 여자에게 묻지도 않고 음식을 주문한다.

한참 있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자 남자와 여자는 먹기 시작한다. 그 음식을 다 먹을 때까지 둘은 눈을 맞추지도, 한 마디 말도 나누지 않았다. 서로에게 화가 나 있는 듯 하다. 싸우고 나서 밥 먹으러 왔나?

우스개 소리대로라면 둘은 부부사이가 분명하다. 음식점에서 중년의 남녀가 화난 듯한 혹은 무표정한 얼굴로 아무 말 없이 식사하면 부부, 도란도란 정답게 대화를 나누며 식사하면 불륜관계라는, 우스개 소리라고 하기엔 어쩐지 서글픈 그 이야기.

책상 앞에서

공원에서 만난 그 처녀 총각의 데이트는 어찌 됐을까. 거리에 나선 세 아이는 엄마에게 더 맞지 않고 무사히 나들이를 마쳤을까? 눈길 한번 맞추지 않던 그 중년부부에게 외식은 무슨 맛일까.

우연찮게 보게 된 이 세 광경은, 씁쓸하지만 우리 주변에서 참 흔하게 볼 수 있는 모습이다. 따지고 보면 이들의 공통분모는 ‘사랑’이다. 연인사이에, 부모와 자식 사이에, 부부사이에 그것은 당연히 존재하는 것이고, 존재해야 한다. 그런데 왜 그렇게들 화를 내고 있었을까?

연인사이가 아니었다면 ‘30분쯤 늦을 수도 있다’고 배려했을 것이다. 옆집 아이를 데리고 나왔다면 찻길의 위험을 차근차근 일러줘 가며 길을 건너게 했을 것이다. 내 남편, 내 아내가 아닌 사람하고 식사를 했다면 그 시간 속에 하다못해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라도 섞였을 것이다. 왜? 예의 때문에.

그러고 보면 우리는 가까운 사이일수록 예의를 생략해버리곤 한다. 사랑하는 사이일수록 앞뒤 가리지 않고 화부터 내고 상처를 주곤 한다. 나를 설명하려 하지 않고 너를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 그래도 서로 내내 행복하다면 별 문제 없겠지만, 어디 그렇던가?

가까운 사이에게 받은 상처는 유별나게 오래가기 마련이다. 사랑하는 사이라는 이유로 섭섭하고 아픈 감정을 뭉텅뭉텅 삼켜버리고 말면 결국은 남보다 더 이해할 수 없고 모르는 게 많은, ‘남보다 못한 사이’가 돼버리기 일쑤다.

보기 드물긴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이들도 있다. 서로 위하고 대접하고 존경하면서도 늘 연인처럼 사는 부부. 함께 이룰 꿈을 가꾸느라 늘 즐겁게 만나는 연인 혹은 친구들. 부모와 스승의 믿음과 사랑 속에서 불가능 없는 미래를 향해 자라는 아이들.

‘너’와 ‘나’가 이룬 ‘우리’ 사이는 어떤 모습일까. 전자에 속한다면 문제는 십중팔구 ‘나’에게 있다. 그 문제를 풀지 못하면, ‘화딱지 나는 세상’은 전적으로 ‘나’의 책임이다. 세상은 ‘나’라는 개개인이 모여 ‘우리식’으로 굴러가므로.

월간 소프트제주 편집장   문    소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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