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고등학교의 연륜은 1세기를 넘는다. 제주고의 시작과 긴 역사는 여느 학교와는 다르다. 제주를 대표하는 중등학교요 광복 전까지는 도내 유일하고 최고의 교육기관이었다. 교명과 학칙은 무수히 변하였으나 하나의 맥으로 이어져 성장하였고, 또 한 세기를 향하여 발전하고 있다.

작금의 제주고 개교연도 논란은 지난 1990년 『제농80년사』를 편찬하면서 사립제주의신학교가 공립제주농림학교로 전환된 1910년을 개교 원년(元年)으로 잡는 바람에 일어난 것이다. 제주고는 1910년 공립전환을 통해 새롭게 태어난 것이라고 해석도 되었지만, 근대적 교육을 통해 국권을 바로 세워보려던 역사를 무시한 것은 아주 큰 잘못이었다.

의신학교는 폐교된 것이 아니라 공립전환이요 공립제주농림의 전신(前身)이 아니라 동일한 학교였던 것이다. 고산관광정보고와 공립한국뷰티고의 관계처럼 의신학교와 제주농림은 체제와 학교간판만 다를 뿐 같은 시설에서 같은 학생을 대상으로 같은 교과목을 가르쳤던 것이다.

사립제주의신학교는 당시 제주군수 윤원구(尹元求 1839~1910)의 신교육에 대한 확고한 의지에 주민이 동조하는 희사금인 순수 민간자본으로 설립된 민립학교였다. 의신학교는 대한제국이 교육을 통해 근대화를 달성하려던 개혁정책에 뿌리를 두고 있다. 전국 여러 학교처럼 미미한 시작이 아니라 확고한 신념과 대단한 교직원과 당당한 시설과 커리큘럼으로 시작된 학교였다. 의신학교의 보통과 농림과 연구과에는 오늘날 중등학교의 필수과목이 다 들어 있어 제주최초의 근대적 중등교육기관으로 부르기에 손색이 없다.

의신학교 개교 이래로 제주고의 교명은 다음과 같이 9회나 달라졌다. 그간의 학제 변경은 이루다 말할 수 없으나, 그 역사는 초창기부터 오늘날까지 한 가지로 연면히 통하고 있다.

사립제주의신학교(1907)→ 공립제주농림학교(1910)→ 제주공립농업학교(1911.11.1)→ 제주공립간이농업학교(1912.5.6)→ 제주공립농업학교(1920)→ 제주공립농업중학교(1946)→ 제주농업고등학교(1951)→ 제주관광산업고등학교(2000)→ 제주고등학교(2008)

제주고는 오현옛터에서 전농로 일대(삼도리283)로, 다시 노형벌(노형동607)로 세 번의 이설과정을 겪었으나 타 학교와의 혼합 없이 일관되게 유지하여 제주지역 중등교육의 역사와 학문의 전통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니 풍전등화 같은 대한제국 말 흥국문민(興國文民)의 기치를 내걸고 젊은이들을 개화시키려는 윤원구 선생 같은 선각자를 폐교(廢校)의 퇴직자로 취급하는 것은 교육자의 도리가 아니다. 대의를 내세운다며 의신학교의 존재를 무시하고 공립만 학교인 것처럼 공립전환 시점을 개교 원년을 따지는 것은 기형적인 역사관이다. 공덕자와 근원을 밝히고 후학들에게 본받게 하는 것이 애국과 애향과 애교(愛校)의 원칙이다.

그 학교의 원년을 정함에 있어 왕도도 없거니와 세계적으로 공통된 기준도 없다. 어디까지나 학교사(學校史)의 사실과 학교 구성원인 학교당국과 동창회의 합의와 선택의 문제이다.

연세대(1884 제중원), 김녕초(1894 김녕정사), 서울대(1895 법관양성소), 동래여고(1895 부산진 일신여학교), 숭실대(1897 숭실학당), 효성초(1898 해성재), 영명중고(1906 영명남학당), 숭일중고교(1907 숭일학원), 보인고(1908 보인학교), 수원고(1909 수원상업강습소), 국립서울산업대(1910 어의동실업보습학교), 하도초(1919 하도개성의숙), 화북초(1921 화북학숙), 구좌중앙(1923 사립중앙보교)...등 모두가 미미한 시작을 개교 원년으로 잡고 있음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제주고의 위상은 제주교육의 자존심과도 연관된 문제다. 실사구시의 지도자를 키웠던 학문의 전통도 중요한 것이다. 제주고가 제주특별자치도의 성장에 걸맞게 명문고로 도약하려면 100년대의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대내외의 명문고들과 경쟁해야 한다. 더욱 육성하질 못할지언정 단순한 실업교육로 폄하하는 나머지 학교교산을 야금야금 빼돌리는 작태도 중지해야 한다.

제주고와 제주교육은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에 있었던 3년의 역사를 별 이유 없이 내팽개쳐서는 결코 안 된다. 선각자 윤원구가 신학문을 가르쳐 나라를 구해보려던 구국(救國)교육의 역사를 복원하는 것은 제주고의 뿌리 찾기이자 격랑의 시대를 살다간 선배들에 대한 예의다. 제주고는 공립전환 100주년을 계기로 1907년의 개교 원년을 살려서 세계로 도전해야 한다. □

김  순  택
세종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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