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주제넘게도 하나의 물음을 가지고 새롭게 출발한다. 우리 사회는 건강한가.

많은 사람들은 최근 일련의 사건에서 병의 징후를 읽고, 추락하는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이라고 말한다. 물론 올바른 시각이다. 범죄는 환경의 제약을 받으면서 주체적으로 형성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로지 그것으로 사회의 건강성을 따지는 것은 성급하다. 범죄는 한마디로 반사회적 악성의 징표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것은 주관성을 가진 행위자의 인격의 현실화일 뿐이다. 이때 우리는 ‘행위자의 위험성’을 제대로 보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하강하는 삶의 징후’는 다르다. 개인적으로 자신속의 생명의 무궁한 근원을 잊어 버리고, 그것도 모른 채 방황하는 그곳에서 나는 우리 사회의 건강성을 읽는다.

우리는 분명 과거보다 풍요롭게 살고 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비록 전반적인 생활 수준이 나아졌다고 하더라도 생활 기반인 토지를 잃고 전업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복지 수준이, 누대로 내려오는 땅을 지키면서 전통적인 삶을 즐기고 있는 농민들의 그것보다 더 높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단언할 근거는 희박하다. 그래서 나는 다시금 ‘전통’을 강조한다.

제주개발은 우리의 사회적 과정을 담아내는 양식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국제자유도시’에 대해 나는 이렇게 묻는다. 그 화려한 구호아래 매몰된 전통적 삶의 운명을 보았는가.

전통은 항상 권위와 결부된다. 모든 권위는 본성상 권위주의적이다. 정도의 차이일 뿐 전통 안에는 언제나 억압과 지배의 요소가 있다. 전통의 수용에 있어 항상 그것에 결부되어 있는 이데올로기적 이해에 빠질 우려가 있다. 나는 그것을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의 정신적인 축적은 전통에 의해 이뤄진다. 지난 시대의 정신적인 축적이 계승되고 당대의 지적인 경험이 보태져 지역문화가 형성된다. 지역문화가 없는 사회는 이미 건강한 사회가 아니다.

전통의 실종이 우리의 실존을 위해 지불해야 할 대가라면 나는 그 어떤 시책에도 과감히 반대한다. ‘공허한 열망을 가진 낭만주의자’라고 욕해도 어쩔 수 없다. 화려한 구호에 마비되어 이견(異見)의 억압이나 집단성이 가하는 폭력을 보려고 하지 않는 것, 또한 그것에 항변할 수 없다는 것, 그때 증명되는 것은 무능력이다.

‘평화의 섬’도 그렇다. 그것을 선언하자는 데 반대할 사람은 없다. 그런데 말이다. 무모한 개발로 자연이 파괴되고, 생존을 위해 피켓을 들고 투쟁할 수밖에 없는 곳에선 평화는 자칫 사치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묻는다. 평화의 개념에 숨어 있는 퇴폐성을 한번쯤 눈여겨 보았는가.

나의 의도는 분명하다. 이것 모두를 폐기하자는 것이 아니다. 가치를 좀더 현실적인 삶에 두고, 그림자를 제대로 보자는 것이다. 화려한 구호에 들떠 있는 자에게는 만사의 초라한 현실을 말해줘야 하지 않겠는가.

나의 물음은 어김없이 다음으로 이어진다. 우리의 비판 언어는 건강한가.
나는 각종 매체를 통해 쏟아져 나오는 그 아름다운 글과 말들을 사랑한다. 그것을 읽어내느라 꼬박 한나절을 보내면서도 그곳에서 나는 우리의 희망찬 미래를 본다.

그러나 주관을 몰아내고 객관적 사실과 가치중립을 내세우는 것은 한마디로 불임증이다. 태양이 작렬하는 뜨거운 계단 위에 앉지 않으려고 몸을 사리는 것은 비겁함이다.
하나를 많이 아는 것이 문제가 될 수 없다. 문제는 하나만을 많이 알고, 많은 것을 모르는 데 있다. 커다란 입만 있고 커다란 눈만 있는 것, 그것은 니체의 ‘전도된 불구자’일 뿐이다.

세상은 변했다. 사람들의 감각과 기호(嗜好)도 달라졌다. 나는 그것을 느낀다. 결국은 무망한 노릇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변함없이 본질적이고 불변적인 것을 찾아 나선다. 아직도 거대담론에 대한 논의는 끝나지 않았다. 이것이 영광스럽게도 이름을 내건 ‘姜政弘 칼럼’을 시작하는 소감이다. 그러나 나는 분명 듣기 위해 쓴다. 질책보다는 칭찬을 경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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