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술집 안에서다. 다정하게 술잔을 나누던 두 남자의 목소리가 갑자기 높다.
“대통령의 탄핵은 헌정 파괴야”

“탄핵도 엄연히 헌법에 규정된 제도인데 그것이 어찌 헌정 파괴냐”
한 쪽은 대통령의 탄핵을 반대하는 사람이고, 다른 한 쪽은 그것을 찬성하는 사람인 모양이다.

“그러니까 넌 수구 세력이야”
“뭐 어째”
숫제 주먹이 오고 갈 판이다. 그때서야 주위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다음 총선 결과를 보자’며 난감한 표정을 지우지 못한 채 묵묵히 술잔을 기운다. 나름대로 ‘잠정적 결론’을 내린 셈이다.

어찌 난감한 게 이 두 사람뿐이겠는가. 국민 대부분이 그렇다. 자기 충족적 폐쇄회로에 빠지면서 스스로를 상대화할 여유를 갖지 못한 우리의 한심한 정치가 만들어내는 웃지 못할 현상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의 대표자 결정은 어떤 식으로 이뤄지는가. 아마 십중팔구 그 답은 ‘선거’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의 문제가 발생한다. 선거결과를 놓고 종종 해석이 엇갈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선거는 국민의 자유의지에 따라 대표자를 뽑는 행위다. 민주주의 원리에 기초를 두고 있는 합리적이고 진보적인 유권자의 표현수단이다. 과연 그런가.

선거제도가 국민의 의사를 제대로 반영하고 있느냐에 대해서는 그만큼 말이 많다. 투표절차가 공정하다고 하더라도 투표자의 선호와 관계없는 자의적 결과를 나타낼 뿐이라는 주장이 있다. 오늘날 선거는 의회제도가 올바른 기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수단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민의를 대표하고 있다는 구실하에 지배를 정당화시키는 조작도구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선거가 유권자의 합리적인 표현수단임을 믿는다면 술집에서의 두 사람의 잠정적 결론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그러나 만에 하나 선거의 합리성에 대한 믿음에 의심이 간다면 두 사람은 또 다른 결론을 내려야 한다.

어찌하든 유권자의 투표행위가 개인의 신념에 근거한 구체적 행동임을 믿는다고 하더라도, 개인의 투표행위가 그의 정책 선호도에 따라 이뤄지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선거쟁점에 대한 유권자의 인식의 폭이 어느 정도이며, 그것이 직접 선거쟁점에 대한 판단으로 이어졌는가 하는 평가에 따라 그 답은 달라진다. 이러한 평가가 있을 때만이 선거결과가 정책적 갈등을 반영한 것이냐, 아니면 다른 비정책적 변수의 작용에서 비롯되었느냐 하는 것을 판단할 수 있다.

만일 이때 선거쟁점이 주된 판단 기준이 되지 못하고, 이른바 혈연 학연 지연 등 제1차적 집단감정이 그것에 개입될 경우, 우리는 선거를 통한 정책의 민주적 통제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이야기할 것이 없게 된다.

그렇다고 하여 나는 이 자리에서 어설프게 선거에 대한 회의론에 동조하고자 하지 않는다. 선거가 지니는 의미는 이념에 불과할 뿐, 현실에 있어서는 그 본래의 의미가 신뢰할 수 없을 정도로 왜곡됐다고 하여, 선거가 국민에 의해 이뤄지는 정치투입의 가장 중요한 형태라는 것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탄핵정국에 의한 정치적 갈등을 다음 총선의 결과로 일거에 덮으려 하는 것은 선거 본래의 이념에 관계없이 옳지 못하다. 우격다짐으로 그렇게 해석한다고 해도 그것은 본질문제를 애써 외면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물론 그것도 한 방법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위험한 정치적 게임이다. 그렇게 될 경우, 또 다른 갈등을 부르거나 그것을 내재화할 우려가 있다. 오늘의 정치적 갈등이 우리의 정치적 구조문제라고 볼 때, 우리 모두는 솔직할 필요가 있다.

오늘의 정치현실이 맺고 있는 관계를 선명하게 포착하지 않으면 ‘수구’니 ‘진보’니 하는 이분법적 언어와 양분법적 세계관만으로 현실을 거칠게 재단하게 된다.

우리 모두는 냉정해야 한다. 그리고 이번 총선을 제대로 읽어야 한다. 다음 총선은 국회의원을 뽑는 선거일 뿐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오늘의 정치적 갈등은 스스로를 상대화하는 정치력으로 풀어야 한다. 그리하여 예의 두 사람의 난감한 고민도 함께 풀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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