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에 두고 온 가족 상봉 기다리는 김영자씨
1951년 1·4후퇴 때 월남···저고리 위에 군복입고 피난
경북 의성 외가서 지내다 제주에 시집···3남 3녀 길러
서귀포시 안덕면 화순리에 사는 김영자(83·여)씨는 요즘 북에 남겨진 가족들의 얼굴이 자꾸만 아른거린다. 당국회담 얘기가 한창 진행 중일 때는 가족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에 부풀었지만, 회담이 무산된 뒤로 남북 관계가 다시 냉각기로 접어들면서 김씨는 연신 한숨만 내쉴 뿐이다.
8남매 중 둘째인 김씨가 어머니와 언니, 동생들의 얼굴을 본 지도 어느덧 62년이 지났다. 함경북도 성진이 고향인 김씨는 6·25 전쟁이 발발한 이듬해인 1951년 1·4후퇴(1950년 12월 말에서 이듬해 1월 초 사이) 때 외삼촌 손에 이끌려 친구와 함께 배를 타고 남한으로 내려왔다. 그의 나이 고작 스물 한 살 때였다.
김씨는 “그해 겨울 몹시도 추웠어. 언제쯤 따뜻해질까 싶었는데 계속 춥더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밤낮없이 콩 볶는 듯한 총소리가 이어졌고, 파편들은 여기저기로 튀었다. 그런 상황에서 김씨는 피난길에 오르기 위해 저고리 위에 군복을 입고 다닐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김씨는 외가가 있는 경상북도 의성군으로 무사히 내려올 수 있었지만, 어머니와 언니, 동생들은 남한으로 오지 못하고 북에 그대로 남겨졌다. 그 이후로 가족 누구와도 연락이 닿지 않았다.
외가에서 쭉 살다가 지금은 세상을 떠난 남편의 고향인 제주로 시집 온 김씨는 3남 3녀를 낳아 길렀다. 그러는 동안에도 몇 날 며칠이고 북에 있는 가족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고 한다. 김씨는 “생사만이라도 확인하는 게 어찌나 그리 어렵던지···”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김씨는 “북에 있을 당시 집에서 온 가족이 오손도손 모여 앉아 두부를 만들어 먹곤 했다. 그 때 먹었던 두부 맛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며 “특히 셋째인 일선이가 두부를 그렇게 좋아했었다”며 손으로 흐르는 눈물을 훔쳤다.
6·25 전쟁으로 남북이 분단된 이후 1985년 처음으로 이산가족 상봉이 이뤄졌다. 첫 상봉 이후 15년이 지난 2000년 6·15 정상회담에 따라 이산가족 상봉이 재개되면서 김씨도 가족을 금방 만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김씨는 어머니는 돌아가셨을 것으로 여기고 언니와 동생들을 찾기 위해 이산가족 상봉 신청을 몇 번이고 다시 했다고 한다.
더욱이 제주에 사는 이산가족들도 북에 있는 가족과 감격스러운 상봉을 하면서 꿈이 현실로 다가오는 듯 했다. 그러나 이산가족 상봉은 2010년 11월 18차 상봉을 마지막으로 더는 열리지 않았다.
김씨의 첫째 아들 이용철(54)씨는 “어머니께서는 ‘북에 있는 가족을 한 번이라도 만나봤으면 좋겠다’는 말을 늘 입에 달고 살았다”면서 “이번엔 정말 기대를 많이 했었는데 결국 회담이 무산돼 가슴이 많이 아프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산가족 상봉은 정치적으로 접근하는 게 아니라 인도적 차원에서 해결해야 하는 문제”라며 “어머니께서 고령이다 보니 하루라도 빨리 북에 있는 가족을 만나게 해드리고 싶은 마음 뿐”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12만8808명의 이산가족 상봉 신청자 중 올해 5월 말 기준으로 5만5347명이 이미 사망한 데다 생존 이산가족 중에선 70살 이상이 80%를 넘는다.
이런 가운데 현재 제주에서 김씨처럼 북에 있는 가족과의 상봉을 애타게 기다리는 이산가족은 모두 577명에 이른다.
관련기사
김동은 기자
dongsans@jejumae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