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에 두고 온 가족 상봉 기다리는 김영자씨
1951년 1·4후퇴 때 월남···저고리 위에 군복입고 피난
경북 의성 외가서 지내다 제주에 시집···3남 3녀 길러

▲ 지난 27일 서귀포시 안덕면 화순리 김영자씨의 아들 이용철씨(오른쪽)가 운영하는 식당에서 김 씨와 이씨, 딸 이종순(왼쪽)씨가 북에 남겨진 가족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고기호 기자
“북에 있는 언니와 동생들을 당장 만날 수 없다면 생사만이라도 알았으면 소원이 없겠습니다.”

서귀포시 안덕면 화순리에 사는 김영자(83·여)씨는 요즘 북에 남겨진 가족들의 얼굴이 자꾸만 아른거린다. 당국회담 얘기가 한창 진행 중일 때는 가족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에 부풀었지만, 회담이 무산된 뒤로 남북 관계가 다시 냉각기로 접어들면서 김씨는 연신 한숨만 내쉴 뿐이다.

8남매 중 둘째인 김씨가 어머니와 언니, 동생들의 얼굴을 본 지도 어느덧 62년이 지났다. 함경북도 성진이 고향인 김씨는 6·25 전쟁이 발발한 이듬해인 1951년 1·4후퇴(1950년 12월 말에서 이듬해 1월 초 사이) 때 외삼촌 손에 이끌려 친구와 함께 배를 타고 남한으로 내려왔다. 그의 나이 고작 스물 한 살 때였다.

김씨는 “그해 겨울 몹시도 추웠어. 언제쯤 따뜻해질까 싶었는데 계속 춥더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밤낮없이 콩 볶는 듯한 총소리가 이어졌고, 파편들은 여기저기로 튀었다. 그런 상황에서 김씨는 피난길에 오르기 위해 저고리 위에 군복을 입고 다닐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김씨는 외가가 있는 경상북도 의성군으로 무사히 내려올 수 있었지만, 어머니와 언니, 동생들은 남한으로 오지 못하고 북에 그대로 남겨졌다. 그 이후로 가족 누구와도 연락이 닿지 않았다.

▲ 김영자 할머니가 북에 남겨진 가족 생각에 눈물을 흘리고 있다. 고기호 기자
외가에서 쭉 살다가 지금은 세상을 떠난 남편의 고향인 제주로 시집 온 김씨는 3남 3녀를 낳아 길렀다. 그러는 동안에도 몇 날 며칠이고 북에 있는 가족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고 한다. 김씨는 “생사만이라도 확인하는 게 어찌나 그리 어렵던지···”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김씨는 “북에 있을 당시 집에서 온 가족이 오손도손 모여 앉아 두부를 만들어 먹곤 했다. 그 때 먹었던 두부 맛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며 “특히 셋째인 일선이가 두부를 그렇게 좋아했었다”며 손으로 흐르는 눈물을 훔쳤다.

6·25 전쟁으로 남북이 분단된 이후 1985년 처음으로 이산가족 상봉이 이뤄졌다. 첫 상봉 이후 15년이 지난 2000년 6·15 정상회담에 따라 이산가족 상봉이 재개되면서 김씨도 가족을 금방 만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김씨는 어머니는 돌아가셨을 것으로 여기고 언니와 동생들을 찾기 위해 이산가족 상봉 신청을 몇 번이고 다시 했다고 한다.

더욱이 제주에 사는 이산가족들도 북에 있는 가족과 감격스러운 상봉을 하면서 꿈이 현실로 다가오는 듯 했다. 그러나 이산가족 상봉은 2010년 11월 18차 상봉을 마지막으로 더는 열리지 않았다.

김씨의 첫째 아들 이용철(54)씨는 “어머니께서는 ‘북에 있는 가족을 한 번이라도 만나봤으면 좋겠다’는 말을 늘 입에 달고 살았다”면서 “이번엔 정말 기대를 많이 했었는데 결국 회담이 무산돼 가슴이 많이 아프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산가족 상봉은 정치적으로 접근하는 게 아니라 인도적 차원에서 해결해야 하는 문제”라며 “어머니께서 고령이다 보니 하루라도 빨리 북에 있는 가족을 만나게 해드리고 싶은 마음 뿐”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12만8808명의 이산가족 상봉 신청자 중 올해 5월 말 기준으로 5만5347명이 이미 사망한 데다 생존 이산가족 중에선 70살 이상이 80%를 넘는다.

이런 가운데 현재 제주에서 김씨처럼 북에 있는 가족과의 상봉을 애타게 기다리는 이산가족은 모두 577명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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