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옥자(수필가)
▲ 공옥자(수필가)

  육식동물의 포악함을 잔인하다고 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짐승들의 생존 방식임을 받아드리지만 먹히는 동물 편에 서면 안타가운 마음이 드는 걸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동물은  배고프지 않으면 사냥하지 않을 뿐 아니라, 비축을 위해서 먹이 감을 대량으로 죽이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인간의 잔인성이 두드러질 수밖에 없다. 누구의 발상인지는 모르나 야만인과 문명인의 대화가 가슴을 서늘하게 했었다
 “야, 아무리 어떻게 인간이 인간을 잡아먹을 수 있었니?”
“그래 우린 굶주려서 그랬지만 너희는 먹지도 않을 사람을 그렇게나 많이 죽이는 이유가 뭐냐?”

척추 마디가 잘 못되어 허벅지 다리로 전기가 지나가듯 저리는 고통을 느낀다고 호소했더니, 잠 들 때 허리에 받침대를 놓으라고 일러주었다. 말 데로 했는데, 그 일도 쉽지 않아 얼마 없어 받침을 치우고 싶었다. 안하던 짓이라 금방 불편해진 것이다. 이만 일도 못하면 어찌 병을 고치겠어. 중얼거리며 재도전 하지만 성과가 신통치 않았다
 그 순간 어느 드라마 장면이 떠올랐다. 얼굴 만 내 놓고 목에다 커다란 나무토막을 걸고 줄줄이 앉아있는 죄인들 모습이다. 그들이 밤이면 얼마나 괴로웠을까 생각이 미치자 참으로 잔인한 짓이구나 하는 느낌이 강렬하게 왔다.
 서구 여행길에 중세 시대에 쓰인 여러 철제 도구들, 목을 자르거나 고문하던 형틀 같은 것을 보며 소름이 돋았다. 이 지구상에 인간처럼 잔인한 종족도 있을까싶었다. 말 네 마리에 사지를 묶어 갈 갈이 찢어 죽였다는 능지처참을 비롯한 사형 제도의 처참함을 익히 알고 있지만 자기가 당하는 일이 아니라서 무심히 지나친다.  인간이 인간에게 가하는 형벌이 가혹했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다. 목을 베고 태워 죽이고 껍질을 벗기고 눈을 파고 성기와 코를 잘랐다. 역사는 정의의 이름으로 무고한 사람들도 형틀의 제물로 사라지게 했다.    한 개인이 사람을 죽이면 살인자가 되어 중형을 받지만 사회 지도자가 국가 수호라는 명목으로 적국인을 수 만 명씩 죽이면 영웅이 되어 찬양받았다.
 지금은 인간의 손에 핵이 놓여 전 지구적 파멸을 불러 올지도 모르는 위험한 시대를 살고 있다.
  사람들이 무심히 폭력적 장면을 보며 쾌감을 느끼고 있는 동안, 자신은  아무 잘못도 없다는 안일함에 젖어 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우리가 흉포한 사회로 가는 공범자로서의 책임이 있다는 것을 깨우칠 수 있을까.
 영화나 드라마 소설 속에는 끔직한 폭력이 난무하고 테러며 살육이 춤을 추지만 누구하나 말리는 사람이 없다. 그 장면들이 청소년들 뇌리에 입력되어 유사 범죄를 저지르고 사회가 날로 흉폭 해 져도 그 심각성을 외면하여 누구하나 고치려는 사람이 없다.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범람하는 폭력과 잔인성을 어떻게 치유하고 정화해가야 할지 난감하여 우울해 진다
 평화나 행복을 모두 바라지만 우리의 선택이 전쟁과 분노 복수나 살상이라면  누가 무엇으로 원하는바 평화나 안녕을 가져올 수 있을 것인가.
  인간이 지향해 가는 방향은 조금씩 진보해 가더라도  뼈 속에 각인된 잔인성이 사라질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그리하여 먼 훗날 우주에 정거장을 만들고 행성을 탐사했던 21세기도 야만의 시대였다고 기록 되리라.

 

저작권자 © 제주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