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옥자(수필가)
▲ 공옥자(수필가)

  제주에서는 11월과 12월은 겨울이 아니다. 태양은 아직 냉기를 품지 않아 다사롭고 하늘도 추위에 얼지 않아 태평하다. 늦가을 정취에 흠뻑 젖어 지낼 수 있는 여유가 있다. 밀감 수확에 농부의 손길이 바쁘지만 날씨는 화창하고 바다는 푸른빛으로 눈이 부신 달이다.  1,2월이 되고서야 비로소 겨울이 소리치며 일어선다.
 눈을 뿌리고 강풍으로 기세를 떨친다. 한라산엔 흰 눈이 쌓여 영산으로 변신하고 아이들은 썰매를 타러 오름 언덕을 찾는다. 아무래도 일이월이 되서야 곡찬 겨울 맛을 제대로 느낄 수가 있다. 하지만 그 세력도 길지 않다. 제주에서는 2월에 이미 봄이 서곡을 연주하기 시작한다. 무엇보다 매화가 피고 노란 수선화가 칼끝처럼 싹을 내민다. 금잔옥대라 불리는 재래종 수선화는 이미 여름부터 싹이 자라 일월이면 꽃을 피워 한 겨울 내내 추위 속에서 청순한 모습으로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해준다. 그러나 외래종인 황금빛 노란 수선화는 한겨울을 땅속에서 견디고 이른 봄 싹을 내밀어 한 달여 느릿느릿 자라 삼월중순에 이르러서야 그 크고 화사한 꽃을 자랑스럽게 펼친다. 노란수선이 피면 그 언저리는 등불을 켠 듯 환해진다.
  2월에 봄을 알리는 또 하나의 전령사는 새이다  제주의 휘파람새는 소리의 명창이지만 겨울동안엔 목이 잠겨 쉿쉿하는 바람소리만 내다가 어떻게 알고 이월 중순이면 쉰 목이 풀려 제대로 꾀꼬리 보다 더 맑고 고운 노래를 부른다. 아직은 이월의 추운 겨울 새벽에 잠이 깨여 귀에 익은 그 새소리 들려오면 온몸으로 전율이 퍼져 오르는 걸 느낀다. ‘봄이 왔구나!’
봄을 기다리지 않은 겨울도 있으랴. 새들도 추운 겨울 다리 오그리고 지내다가 봄기운 느끼자마자 날개 펴고 부산스럽다. 삼월이면 까치가 나무 가지 사이에 새둥지를 틀거나 묵은 집을 수리하며 알 품을 준비를 하고 봄 꿩이 우거진 풀숲에 보금자리를 만드느라 들판이 수런대는 계절이 온 것이다. 뻐꾸기가 청승스런 울음으로 길어진 소리를 끌고 두견새가 깊은 한숨을 토해내는 봄은 새들의 계절이기도 하다. 문득 유치환 시인의 춘신(春信) 떠오른다.
           춘신
                     유 치환

꽃등인 양 창 앞에 한 그루 피어 오른/살구꽃 연분홍 그늘 가지 새로
작은 멧새 하나 찾아와 무심히 놀다 가나니./적막한 겨우내 들녘 끝 어디메서
작은 깃을 얽고 다리 오그리고 지내다가/이 보오얀 봄 길을 찾아 문안하러 나왔느뇨.
앉았다 떠난 아름다운 그 자리에 여운 남아/뉘도 모를 한때를 아쉽게도 한들거리나니
꽃가지 그늘에서 그늘로 이어진 끝없이 작은 길이여.
작은 새들이 가지사이로 드나든 길을 끝없이 작은 길이라고 표현한 그 말이 얼마나 절묘한가.
  매화가 질 무렵엔 목련봉오리가 부풀고 개나리가 피고 진달래가 뒤를 잇는다. 잔디가 푸르러지는 사월이면 온천지가 꽃밭인 듯 화려한 벗 꽃이 함성을 지르며 터지지만
 짧은 몇 날의 영광을 뒤로하고 꽃잎이 흩날리듯 지고 나면 제주를 황홀한 향기로 가득 채우는 밀감 꽃이 핀다. 귤 맛이 제아무리 좋아도 귤 꽃 향기에 비길 수 있으랴.
꽃이 만개한 귤 밭 근처에 서서 깊은 들숨을 마셔보라 그대는 틀림없이 잠시 낙원을 맛보리라. 하늘과 대지가 손을 마주 잡고 온갖 생명을 불러내는 봄!
삶이란 생명의 춤일 것이다 봄은 그 춤이 절정에 이르는 계절일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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