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따라 이야기따라] 정인 지키려 자신 희생한 의녀 홍윤애 이름 딴 길
그의 고결한 정신·순정한 사랑에 제주 여성 '심금'

'김만덕로'나 '금백조로'등 어느 순간 우리 귀에 익지 않은 단어들이 등장했다. 정부가 올 1월 1일부터 주소체계를 '도로명주소'로 전면 변경, 시행한 데 따른것이다. 이에 따라 제주에는 3900개가 넘는 도로명주소가 생겨났다.‘노형동’, ‘이도동’, ‘삼도동’, ‘정방동’ 등 귀에 익었던 단어는 사라지고 ‘부룡수길’, ‘신흥로’, ‘돈오름로’등이 들어보기는 했지만 아주 친숙하지 않은, 심지어 다소 생소한 단어들이 새로운 주소의 주인공이 됐다.

하지만 새로운 주소명에는 스토리가 있다. 김만덕로는 제주여성의 강인함과 나눔을 상징하는 김만덕의 이름을 딴 도로명이다. 또한 금백조로는 제주의 무속신화의 주인공인 금백조가 구좌읍 오름군락으로 이어지는 길의 주인이 돼 현실로 내려온 경우다.

이에 따라 본지는 스토리를 입은 제주의 도로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도로명에 얽힌 제주의 역사와 설화를 풀어가는 일은 제주와 제주인의 가치를 재음미하는 기회도 될 것으로 기대된다. [편집자주]

 

홍랑길.

애절한 사랑을 담은 홍랑길. 홍랑길은 '벚꽃'하면 떠오르는 전농로 바로 인근에 위치했다. 홍랑길은 한국토지주택공사 제주지역본부건물 서쪽 골목 입구에서 서광로까지 이어지는 약 500여m(0.512km)의 도로라고 한다. 홍랑길 동쪽에는 삼성초등학교가 위치했으며, 홍랑길을 따라 동서방향으로 나있는 동네 골목길에는 홍랑1로부터 홍랑7로까지 '홍랑길'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홍랑(洪娘)은 말 그대로 '홍씨 성을 가진 낭자'다. 홍랑의 주인공은 바로 의녀(義女)홍윤애(?~1781)다. 홍윤애는 조선시대 정조때 제주 목에 살았던 여인으로, 절개를 지키고 신뢰와 사랑을 보여준 주인공으로 알려져 있다. 사랑하는 한 사람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홍윤애… 그가 사랑한 남자인 조정철과의 눈물어린 사랑이야기를 소개한다.

# 홍윤애, 유배온 조정철을 만나다

때는 정조 1년. 정조 임금을 죽이고 은전군인 이찬을 추대하려는 역모사건이 발각되면서, 주동자와 연루자들이 관가에 줄줄이 잡혀 들어갔다. 당시 나이 27살이었던 조정철은 조선의 유서 깊은 명문가의 자손이었다. 하지만 조정철의 장인이 역모사건의 주동자 중 한 사람인 것으로 알려지면서 그는 제주로 유배를 오게 됐다.

조정철은 화장실에 가는 것 외에는 모든 행동을 감시 받았다. 이 때문인지, 조정철은 풍토병에 걸린 것도 모자라 영양실조에 치아가 빠지기도 했다. 제주목 관아에 살고있던 홍윤애는 이웃 오라버니의 부탁을 받아 조정철의 의복이며 식사 수발을 도왔다. 홍윤애의 손길은 조정철에게 있어 한 줄기 맑은 샘물과도 같았다. 이들의 사랑은 이렇게 시작됐다.

# 홍윤애와 조정철, '샘물같은 사랑'

하지만 행운도 잠시. 당파가 서로 달라 오랫동안 앙숙이었던 김시구가 정조 5년(1781년)에 제주목사로 부임하게 됐다.

김시구는 판관 황윤채와 짜고 조정철을 제거하려고 했다. 김시구는 조정철을 죽이면 '살인자'로 낙인찍히기 때문에, 죽을 만큼 몽둥이질을 했다고 한다. 그 후 조정철을 관덕정 광장에 내다버린 것으로 전해진다.

김시구는 백성들에게 이 같이 말했다고 한다.

"조정철은 상감마마께 큰 죄를 저질렀다. 앞으로 이 자를 보호하거나, 한 모금의 물이라도 주는 자가 있다면 그자를 가만두지 않겠다."

김시구는 조정철이 마침내 죽었다는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조정철은 살아났다. 바로 홍윤애가 조정철을 구했기 때문이다.

조정철과 홍윤애 사이에는 딸이 하나 있었다. 홍윤애는 관가로 끌려가기 전, 태어난지 두 달 밖에 되지 않은 어린 딸을 언니 품에 안겨 한라산 속 절로 보냈다. 김시구는 다된 밥에 재를 뿌린 홍윤애를 보자마자 증오심에 몸을 떨었다. 김시구는 홍윤애에게 자백을 요구했다.

"조정철이 임금을 저주했더냐! 자신을 귀양 보낸 조정 중신들을 저주하더냐! 다른 유배인 들과 서찰 교환을 하고, 몰래 접촉도 하려 했느냐."

이미 죽음을 각오한 홍윤애는 이런 죄목을 하나도 인정하지 않았다. 몽둥이 60개 정도가 부러지자 홍윤애의 몸은 살이 찢어져 흩어지고, 피투성이가 돼 바닥에 나뒹굴었다. 더 이상 극심한 고문을 이겨내지 못하고 조정철에게 불리한 증언을 할 것 같은 위기에 처한 홍윤애는 마침내 목을 매 죽고 말았다. 홍윤애는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무참히 짓밟힌 채 결국 죽음을 맞이했다.

 

▲ 홍윤애 무덤과 비석.

 

 

 

 

 

 

 

 

 

 

 

 

 

 

 

 

 

# 조정철, 통곡하며 추모시를 쓰다.

이 사건 후 조정철은 정의현 김윤재와 김응귀의 집으로 적거지를 옮기게 되고, 7년 후 나주로 이송돼 1805년까지 유배생활을 하다 풀려났다. 1810년, 드디어 조정에 출사하게 된 조정철은 죽은 홍윤애의 혼을 달래기 위해 그의 무덤에 자신이 직접 쓴 묘비까지 세웠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목사의 신분인 사대부가 정혼한 사이도 아닌 여인의 무덤에 찾아가 통곡을 하고 추모시를 써서 비석을 세운 예는 조선시대에 오로지 이것이 유일하다. 이 묘비문은 유배문학의 꽃이라 일컬어진다.

다음은 조정철이 지은 묘비문이다.

"옥 같던 그대 얼굴 묻힌 지 몇 해던가. 누가 그대의 원한을 하늘에 호소할 수 있으리… 황천길은 먼데 누굴 의지해 돌아갔는가… 진한 피 깊이 간직하고 죽고 나도 인연은 이어졌네. 천고에 높은 이름 열문에 빛나리니 일문에 높은 절개 모두 어진 자매였네(중략)."

홍윤애의 무덤은 제주시 홍랑길에 있는 제주국제교육정보원 동남쪽에 있었다. 옛 제주성지 밖에 위치했던 홍랑길은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이어서, 이 곳에 홍윤애를 묻은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 후 1920년대 이 곳에 제주공립농업학교가 생기면서 제주시 애월읍 유수암리로 무덤은 옮겨졌다. 무덤이 있던 자리에는 '홍윤애의 무덤터'라는 표석만 남아있다. 현재 홍랑길에는 삼성초, KT 제주본부, 한국토지공사 등이 들어섰다.

# 홍윤애 기리기 위한 추모문학제 열려

제주문인협회(회장 김순이)는 홍윤애를 기리기 위해 지난해 처음으로 홍윤애 묘에서 '제1회 의녀 홍윤애 추모문학제'를 열었다. 제주문인협회는 홍윤애가 순절한 날인 음력 5월 15일에 맞춰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김순이 회장은 “홍윤애의 고결한 정신과 순정한 사랑은 제주여성에 귀감이 된다"며 "제주여성사에 빛나는 금자탑으로 조명돼 마땅하다”고 강조했다. '죽음'으로써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낸 제주여인 홍윤애. 이 시대에 '목숨을 건 사랑'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겨 보게 한다. [제주매일 박수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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