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의회는 지방자치의 근간이며, 풀뿌리 민주주의의 산실이다. 도의회는 지방정치의 중심에서 주민 갈등과 지역의 이슈를 조정하는 ‘민의(民意)의 용광로’가 돼야 한다.

그러나 제주도의회가 민의를 대변하는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는 지는 의문이다. 전문성과 일부의 도덕성 문제로 도민의 대표기관으로서의 위상을 높이지 못한다는 평가가 많다. 의정활동은 집행부 정책에 대한 지적 위주로 정책대안 제시는 미흡하다. 특히 지역발전을 위한 의제(Agender) 설정 능력이 부족한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도의회가 이슈를 만들어 정국을 주도하는 힘이 약하다 보니 행정기관 중심의 지방자치가 되고 있다는 게 중론이다. 제10대 제주도의회에서도 이 같은 상황은 달라지지 않고 있다. 최근 있었던 ‘예산권 공유’ 논란이 의제 설정에 미숙을 드러낸 대표적인 사례다.

구성지 의장은 지난달 14일 기자회견을 통해 “지금까지의 예산편성 관행을 혁신, 도의원들이 수렴한 지역주민들의 요구사항을 반영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 ‘예산의 협치 시대’를 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도의회 심의과정에 예산안이 대폭 손질되는 비효율적인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예산편성 시 도와 의회가 사전에 협의하자는 것이 그 취지다. 이 제안에 대해 ‘집행부 예산편성권 침해’라는 비판이 비등했다. ‘의원들 제 밥그릇 챙기기’ ‘재량사업비 부활’ 논란으로 비화하면서 도의회가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그런데 구 의장의 주장이 터무니없는 내용은 아니다. 대통령제의 원조 격인 미국에서 예산편성권은 의회에 있다. 우리 국회에서도 “미국처럼 예산편성권을 국회가 가져 ‘견제와 균형’의 원리를 제대로 구현해야 한다”며 예산편성권 이관을 주장하는 부류가 있다. 최근에는 남경필 경기도지사가 “예산편성권을 도의회와 나누는 연정(聯政)을 실시하겠다”고 밝혀 주목을 받았다.

‘예산권 공유’를 도의회의 집행부 예산편성권 침해로만 볼 일은 아니다. 제도는 시대 추이에 따라 보완되고 바뀔 수도 있다. 집행부의 예산편성 단계에서부터 도의회 감시․견제 기능이 작동한다고 이상할 게 없다. 반대로 집행부는 도의원들의 ‘지역구 챙기기 선심성 예산’을 감시하면 된다.

사람이 문제이지 제도는 운용하기 나름이다. 도의회는 전략도 없이 섣불리 ‘예산권 공유’를 제시, 결국 ‘없던 일’로 만들었다. 도의회 차원에서 이 문제를 다시 꺼내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한마디로 의제 설정에 실패한 것이다. 도의회는 ‘예산권 공유’ 화두(話頭)를 던지기 전에 도민 설득논리부터 개발했어야 했다. 제안 시기도 문제다. 예산 정국을 앞두고 ‘예산권 공유’를 불쑥 제안하면서 도민 불신을 자초했다.

민선6기 제주도정 방침인 ‘협치(協治)’에 편승해 도의원들이 예산권한을 확대하려는 ‘꼼수’를 쓰는 것으로 비쳤다. 도의회는 부인하고 있지만 구체적으로 ‘의원당 예산(재량사업비) 20억원 요구설’이 돌았다. ‘예산권 공유’는 집행부의 반격에 주저앉은 형국이다.

집행부는 물론 의회 구성원과도 사전에 면밀한 검토 및 협의 없이 추진한 결과다. 무엇보다 의원들과 이해관계 있는 사안을 의제로 삼은 점이 도민 공감을 얻지 못한 가장 큰 이유다. 도의회는 인사청문회 도입으로 모처럼 얻은 점수를 ‘예산권 공유제’로 인해 잃었다. 행정시장 등에 대한 인사청문회는 고위공직자의 도덕성과 업무수행 능력을 검증해야 한다는 도민 정서를 도의회가 제대로 반영한 것이다.

후보자 ‘신상털기’ 등 일부 운영상 문제가 있지만 청문회는 도내에서 새로운 정치문화로 자리 잡을 것으로 전망된다. 도의회는 의제설정 능력을 키워야 한다. 의제가 거대 담론(談論)일 필요는 없다. 주민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민생 사안이 오히려 바람직하다.

예컨대 날로 심각해지는 주차문제를 도의회가 앞장서서 해결하는 모습을 보이면 안 될까. 도와 도의회는 그 역할이 다를 뿐 도정을 함께 이끄는 양대 수레바퀴다. 개개의 도의원들은 민원 해결사 ‘동네 유지’에 만족하지 말고 보다 큰 틀에서 지역사회 발전에 선도적 역할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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