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따라 이야기따라]④고사훈의 의병정신 기린 '승천로'
이석공·김석윤 등 10여명과 의병거사 결의
일제의 겁박에도 타협 않고 최후까지 저항

때는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대한민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강제로 을사늑약(乙巳勒約)을 맺고 , 우리나라를 자신들의 식민지로 삼기 위해 통감부(統監府)를 설치했다. 1907년에는 당시 대한민국의 황제였던 고종이 네델란드의 수도 헤이그에서 열리는 ‘제2회 만국 평화 회의’에 특사를 파견, 을사늑약이 일제의 강압으로 이뤄진 것임을 폭로하기 위해 이준·이상설·이위종을 파견했다. 그러나 회의에서 발언권을 부여받지 못한 대한민국의 특사들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으며, 그 뒤 일제는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군대까지 해산시켰다.

이에 따라 울분을 참지 못한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전국 곳곳에서 의병항쟁을 일으켰다. 제주에서도 의병장 고사훈(高仕訓)을 비롯해 이석공(李錫公) 등 10여명의 의인(義人)이 모여 일본에 항거하는 의병항쟁을 시작한다.

이들 가운데 ‘길 따라 이야기 따라’ 네번째 주인공인 고사훈은 유학(幼學) 고영길(永吉)의 차남으로, 1871년(고종 8년) 지금의 제주시 동광양에서 태어나 1909년(순종 4년)에 순국했다. 고사훈의 의병정신을 기리는 곳은 도로명 주소로 ‘승천로(承天路)’라고 하며, 실제로 그가 이곳에 살았었다. 당시 애국지사 등은 일본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이름을 바꾸기도 했는데, 고사훈 역시 ‘고승천(高承天)’으로 개명했다. 이 때문에 길 이름이 ‘승천로’로다. 제주시 동부경찰서 뒤편에서부터 제주제일중학교 인근까지 약 1KM에 해당하는 승천로는 1997년 제주시가 지은 도로명 주소다. 승천로 근처에는 제주교육박물관과 제주시교육지원청, 올리브 영 제주점 등이 있다.

▲제주 전역에 격문 돌리며 의병 모아

▲ 의병장 고사훈.

고사훈은 1908년 7월 당시 제주군수였던 윤원구로부터 제주도가 일본인의 손에 들어간다는 소문을 듣게 됐다. 이에 따라 나라를 위해 자신의 몸을 바치겠다고 다짐한 고사훈은 1909년 2월 25일 항일투쟁을 벌이기 위해 이중심(李中心), 이석공(李錫公), 김석윤(金錫允), 조인관(趙仁官), 노상옥(盧尙玉) 등 10여명의 의인들과 의병거사를 결의한다. 이들은 고사훈과 이중심을 의병장으로 추대한 뒤 본격적인 항일투쟁에 돌입했다.

군수품을 모으는데 전념했던 고사훈은 현재 제주시 화북2동에 위치한 황사평에서 비밀리에 의병들을 훈련시키고, 필요한 자금을 마련해 나갔다. 또한 현재 ‘광양’이라 불리는 제주시 이도2동에 대장간을 차려 무기를 제조, 의병거사에 사용하도록 했다.

고사훈을 중심으로 한 의병들은 “빠른 시일 내에 일본인의 손에 제주 전역이 점령당하게 생겼으니, 이를 방지하기 위해 우리가 일본인을 미리 살해할 것”이라는 내용을 담은 격문(檄文)을 제주 전 지역에 배포했다. 또한 구체적인 행동사항이 담긴 ‘통고사(通告事)’도 함께 돌린 것으로 전해졌다.

다음은 통고사 중 일부다.

-금월 12(양력 3월 3일)일 관덕정에서 점고할 때 미참한 이장의 목을 벨 것.
-선박은 출입을 엄금한다. 이에 누구의 선박이 있고 없는지 상세히 닦아 보고할 것.

화북을 출발한 의병들은 제주를 한 바퀴 돌아 용담에 도착, 1909년 3월 3일 관덕정에 모여 궐기대회를 열기로 결정했다. 이를 위해 일만명의 의병을 모으고, 도민 전체의 항쟁으로 확산시키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궐기대회 당일 고사훈은 김만석 등과 함께 대정읍 신평리와 영락리, 당시 광청리로 불렸던 안덕면 동광리 등에서 의병과 장정 300여명을 규합한 뒤 관덕정으로 향했다. 계획대로라면, 의병들이 관덕정에 도착하면 이중심과 김석윤 등은 관덕정에서 군사를 일으켜 일본인들을 모조리 죽여야 한다. 하지만 당시 정보원이자 밀고자로 알려진 대정군수가 일본경찰과 협력해 의병들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고사훈과 김만석은 잡히고 말았다.

대정에 도착한 일본경찰은 투옥 중이던 고사훈에게 항복을 권유했지만, 이를 듣지 않자 “우리에게 협력하면 높은 관직에 올라갈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고사훈은 “너희들 때문에 우리나라가 이 지경까지 오게 됐다. 지금 나는 구차하게 너희들의 이야기를 들을 필요가 없다. 오직 죽음으로써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겠다"고 답하며, 일본에 굽히지 않는 꿋꿋한 기개를 보여줬다.

그 후 고사훈은 포승(捕繩, 죄인을 잡아 묶는 노끈)을 끊고 감시하던 순사를 쓰러트린 뒤 탈출에 성공했지만, 제주경찰서장 청수중만의 한국인 부하인 강 순사가 쏜 총에 맞아, 대정성(大靜成)동문 밖에서 순국했다.

▲日, 고사훈을 폭도의 수괴(首魁)라 지침

일본은 고사훈을 폭도의 수괴(首魁)라고 불렀다. 고사훈은 일본세력의 침입을 정확히 꿰고, 시의적절한 행동을 함에 따라 일본도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일본의 거듭된 겁박에도 타협하지 않고 최후까지 저항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한 고사훈. 그는 살아서 굴욕을 당하는 것보다는 의로운 죽음을 택해 항쟁의 계승을 염원했다. 고사훈의 투철한 민족정신은, 높이 평가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된다.

▲“차라리 고승천로로 지었으면 좋았을 텐데”

제주일중 인근에 살고 있는 주민 박모(63)씨는 “이 곳에서 산지 30년이 다 돼가지만, 승천로가 의병장 고사훈을 뜻하는 것 줄 처음 알았다”며 “동네 주민 중 승천로의 뜻을 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차라리 승천로가 아닌, 그의 이름 전체를 딴 고승천로라고 했으면 조금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다”며 ”우리나라를 위해 몸 바친 분을 기리는 곳이, 많이 알려지지 않아서 안타깝다“고 밝혔다.

한편 1977년 고사훈을 비롯해 나라를 위해 항일투쟁을 벌인 이들을 위한 기념탑이 제주시 사라봉에 세워졌고, 이들의 넋을 기리는 모충사(慕忠祠)가 건립됐다. 같은 해 정부는 고사훈에게 건국포장(褒章)을, 1990년 8월 15일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는 현재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치돼있다.

마지막으로 1909년 3월 4일 일본경찰에 끝까지 항거하다 순국한 그가 남긴 말을 되새겨본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가장 소중한 것은 나라의 은혜에 대한 충성이요 부모에 대한 효도다. 만약 자식으로서 부모의 곤궁(困窮)함을 구하지 못하면 불효요, 나라의 위급함을 걱정해 나서지 않으면 불충(不忠)이 되는데 이는 짐승과 다를 바 없다.” [제주매일 박수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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