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따라 이야기 따라 5]최영로·막숙포로

서귀포시 법환동에는 고려의 무신(武臣)이었던 ‘최영(崔瑩)장군(1316~1388)’과 관련된 길 2곳이 있다. 최영로와 막숙포로가 바로 그곳이다.

‘최영 장군’하면 많은 사람들이 '목호의 난(牧胡―亂)'을 떠올릴 것으로 예상된다. 최영 장군의 이름을 딴 최영로(약 0.972Km 구간)는 목호의 난 당시 고려군과 목호군의 마지막 격전지로 알려져 있으며, 막숙포로(약 1.674Km 구간)는 고려군이 법환포구에서 머물렀던 곳이었다고 한다.

목호는 고려시대 제주에서 말을 기르는 몽골인을 뜻한다.

▲몽골인 목호들 “명나라에 우리의 말을 바칠 수 없다”

칭기즈 칸의 손자이며 몽골제국의 제5대 대칸(大汗)으로 즉위한 쿠빌라이가 세운 원(元)나라는 탐라(耽羅)를 근거지로 항쟁을 벌였던 삼별초 군을 1273년(원종 14년) 진압한다. 이어 원은 이 곳에 ‘탐라국초토사(耽羅國招討司)’라는 직할 관청을 세워 제주도를 통치하기 시작했고, 몇 년 뒤 이곳을 군민도다루가치총관부(軍民都達魯花赤總管府)로 이름을 바꾼다.

고려 충렬왕 2년째인 1276년. 원은 탐라에 목마장(牧馬場)을 만든 뒤, 몽골인 목자(牧者)를 보내 자신들의 나라에서 가져온 말을 기르게 했다.

그러다 1295년 탐라가 고려에 귀속되면서, 이름이 제주(濟州)로 바뀌고 목사(牧使)와 판관(判官)을 파견했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원나라의 간섭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한 것으로 전해진다.

1368년 중국 역대 왕조 중 하나로 손꼽히는 주원장(朱元璋)이 원나라를 몰아내고, 명(明)나라를 세우게 된다. 명나라는 공민왕 19년인 1370년, 고려와 국교(國交)를 맺는다. 당시 고려가 명나라에게 보낸 ‘탐라계품표(耽羅計稟表)'를 보면 ▲탐라의 통치권은 고려에 속한다 ▲몽고인이 목양하던 말은 제주관원의 책임 아래 기른 뒤 바친다 등의 내용이 있다.

이에 주원장은 “탐라의 통치권은 당연히 고려에 속한다. 몽골의 말은 제주인이 관리하라”며 “그 대신, 지금 있는 말들 가운데 좋은 말 2000필을 우리에게 바치라”고 명령한다.

고려는 명나라와의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 1372년 3월, 말을 뽑기 위한 관원인 예부상서(禮部尙書) 오계남(吳季男), 비서감(秘書監) 유경원(劉景元)을 제주에 파견한다. 오계남은 해상에 왜구가 출몰하니 궁병 425명에게 해상 호송을 경계하도록 하고, 유경원은 목사 이용장, 권만호 안방언 등과 함께 말을 징발하기로 했다.

그러나 몽골인 목호들인 석가을비(石加乙非) 초고도보개(肖古道甫介) 등은 이에 불응, 유경원·이용장·안방언 등을 죽이고 상륙한 궁병 300여명도 살해했다. 이 까닭에 오계남은 상륙도 못하고 급히 돌아가서 목호의 반란을 공민왕에게 아뢴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1374년 주원장은 예부주사(禮部主事) 임밀(林密)과 자목대사(?牧大使) 채빈(蔡斌)을 고려로 보내, 말 2000필을 보낼 것을 독촉한다. 이에 공민왕은 사람을 제주로 보내 말을 징발하고자 했지만, 몽골인 목호들이 “우리 세조황제가 기른 말을 어찌 명나라에 바치겠느냐”며 단지 말 300필을 내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격분한 공민왕은 최영 장군에게 몽골인 목호들을 토벌하도록 지시했다. 공민왕은 최영 장군을 필두로 염흥방(廉興邦)을 도병마사(都兵馬使)로, 이희필(李希泌)을 양광도상원수(楊廣道上元帥), 임견미(林堅味)를 부원수(副元帥), 지윤(池奫)을 경상도상원수(慶尙道上元帥)등으로 삼아 1374년 8월 14일 전쟁에 쓰는 배 314척과 정예군졸 2만5650여명을 거느리고 전남 진도를 출발했다. 출정군 말고도 예비부대가 경기와 충청 등의 지역에 따로 주둔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몽골인 목호들, 범섬으로 도망치다

제주로 오던 출정군은 역풍을 만나 8월 28일까지 소한도와 보길도에서 머물다가 바다로 나갔는데, 이번에는 모진 바람을 만나 배 30척이 파손되자 추자도로 가게 됐다. 이 곳에서 순풍을 기다린 최영 장군은, 제주시 한림읍 명월포에 닻을 내린다. 최영 장군은 전 제주목사 박윤청(朴允淸)을 몽골인 목호들에게 보내 왕지문서(王旨文書)를 전하고 귀순할 것을 요구했지만, 이들은 문서를 찢어버리고 선발대로 상륙한 11명의 군인과 목사 이하생도 살해한 뒤, 완강히 저항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출정군은 어름비(애월읍 어음리)~밝은오름(한림읍 상명리)~금물오름(한림읍 금악리)~새별오름(애월읍 봉성리)~예래동(서귀포시 예래동)~홍로(서귀포시 동·서홍동)에서 몽골인 목호들을 격퇴한다.

이 당시 몽골인 목호들도 제주출정군에 맞설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목호의 수뇌부로 알려진 석질리필사(石迭理必思)·초고독불화(肖古禿不花)·관음보(觀音保) 등은 3만8830여명과 함께 제주 한림읍 명월포에 포진해있었다고 한다.

치열한 전투가 계속 진행되고… 서귀포시 법환동으로 후퇴 한 몽골인 목호들은 최후의 결전지인 ‘범섬’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바로 이 곳이 지금의 ‘최영로’다.
 
▲최영 장군, 지금의 막숙포로서 공격방법 모색하다

범섬 앞 법환포구에 군막을 친 최영의 군대는 지금의 '막숙포로'에서 공격방법을 찾는다. 작은 섬이지만, 해안에서 1.3km나 떨어져 있고 배를 붙일 곳 하나 없어 절벽으로 둘러싸인 섬을 공략하기가 쉽지만은 않았다. 최영 장군은 배 40척을 몰고 범섬 주변을 에워싼 뒤, 목호들을 압박했다. 이 과정에서 다양한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최영 장군이 범섬을 공격하기 위해 배를 연이어 묶어 다리로 사용했다는 이야기와, 범섬 사방이 절벽으로 돼있어 상륙하기가 힘들자 많은 연에 불을 달아서 공격했다는 설(說)도 있다.

수뇌부는 전투에 밀리자 석질리필사는 항복하고, 초고독불화와 관음보는 벼랑에서 몸을 던져 자살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최영 장군은 석질리필사를 죽인것도 모자라 그의 아들 3명의 목을 베고, 자살한 이들의 시신을 찾아내 목을 베어 개경(開京)으로 보냈다고 한다. 그렇게 한 달에 걸친 전쟁은 드디어 끝이 난다.

‘목호의 난’은 제주인에게 어떻게 기억되고 있을까. 다음은 1418년 제주목 판관으로 부임했던 하담(河澹)이 목호의 난 목격자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우리 동족이 아닌 것이 섞여 갑인(甲寅)의 변을 불러들였다. 칼과 방패가 바다를 뒤덮고 간과 뇌는 땅을 가렸으니 말하면 목이 멘다.”

당시 제주인들은 '목호의 난'을 생각만 해도, 목이 메일만한 피해를 입었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제주인에게 '고려군'은 또다른 침략자였던 것은 아닐까.

한편 ‘제주올레 7코스’인 이 곳에는 법환포구를 기점으로 많은 게스트하우스와 음식점 등이 들어섰다. [제주매일 박수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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