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호동의 차이나 스토리 < 2 > 중국의 상징 천안문

▲ 중국 대륙의 수많은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천안문. 그 뒤로는 24명의 황제가 백성을 다스리고 인간으로 생활했던 자금성이 있다.

아편전쟁·세계대전·내전 종료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명·청나라 황궁 ‘자금성’ 정문 익숙한 중국 대표 이미지

중국 등소평 이후 개방화 타고 급속 성장 세계무대 부상

중국이 베이징 올림픽을 치른 2008년의 가을을 시작으로 매해 10월이면 참가하는 베이징 국제마라톤 대회는 옛 황궁 앞 광장에서 출발하여 올림픽 광장에서 끝이 난다.

교통이 잘 통제된 천안문(天安門․티엔안먼)앞 큰 길에서부터 중국 정부 최고 지도자들의 집무실과 숙소가 있는 중남해(中南海․쭝난하이) 앞으로 달리다 보면 중국의 긴 역사 속을 지나는 듯한 묘한 감상이 있다.

줄곧 베이징 시내를 달려 풀코스 도착 직전, 러너들이 뛰어야 하는 가장 힘든 코스인 올림픽 광장에 길게 이어진 도로는 베이징의 중심인 천안문까지 일직선상에 있다. 마라톤 코스는 중국의 심장부에서 출발하여 금세기 가장 화려했던 중국인들의 축제인 베이징 올림픽 현장에서 막을 내리며 나름의 의미를 이야기한다.

올림픽 못지않는 영광의 순간들을 늘 더해가며 살아서인지 매년 달리며 만나는 거리의 많은 시민들의 표정은 밝고 응원의 박수 소리는 여유롭다. 60년 전 그들이 새로이 만들어 가꾸어 왔던 나라가 피어내기 시작한 결실의 크기가 해마다 더 풍요로워지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중국 대륙의 묵직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천안문과 그 앞의 광장, 그리고 그 뒤로 이어지는 자금성(紫金城․쯔진청)이 있다. 오성홍기 날리는 광장과 그 광장을 내려다보고 있는 명․청나라의 황궁 정문인 천안문 풍경은 한국인들에게는 아주 익숙한 중국의 대표 이미지다.

광장은 황궁의 정문 앞마당으로서 동․서․남 3면에 벽을 세워 일반인들의 통행을 금지시켰던 500여 년 간 황제의 지역이었다. 신해혁명 이후 벽은 허물어지고 동서로 도로가 이어졌다. 100만명을 수용할 수 있다는 이 곳 광장에 서서 천안문 쪽을 바라보면 마오(毛)주석의 대형 초상화가 보이고 그 뒤로 자금성이다.

그리고 왼쪽으로는 인민대회당이 오른쪽으로는 역사박물관이 있다. 중국인들이 ‘우주의 중심’이라고 과장과 희망을 섞어 얘기하는 중국 수도 중심의 풍경이다. 마지막으로 광장의 저 끝으로는 마오의 기념관이 있다. 세상을 떠나 미라가 되어서도 인민들을 계속 만나고 있는 마오는 1949년 10월1일 천안문 누각에 서서 광장을 내려다보며 새로운 중국의 시작을 알렸다.

24명의 황제가 백성을 다스리고 인간으로 생활했던 자금성으로 인도하는 천안문, 그 높은 건축물에 선 마오는, 그 직전까지 천안문과 자금성이 겪었던 불행의 시대를 닫고, 중국민족이 견뎌낸 치욕의 시간들을 종식시키며 새롭게 시작하는 신중국의 개국을 선포했다. 1921년부터 28년간의 시간, 대장정으로 상징되는 공산당 투쟁의 종식을 28발의 예포로 알리는 동시에 새로운 정권의 탄생을 알린 것이다.

1840년 아편전쟁을 시작으로 이어진 세계 열강에 맞섰지만 시종 무력했던 투쟁과 무엇보다도 가까이 있는 일본과의 수십 년에 걸친 전쟁도 세계대전의 종식과 함께 끝이 나고, 마지막 중국민족이 겪은 최악의 내전인 국민당과의 투쟁을 종식한 뒤 중국인들은 대륙에서 그들만의 새로운 국가를 시작한 것이다. 그날 광장에서는 운집한 30만 명과 함께 장장 7시간의 개국의식이 성대하게 진행됐다.

그런데 아쉽게도 웅장했을 당시의 역사적 장면을 제대로 회상할 수 있는 기회가 사라져버렸다. 당시 스탈린이 이 기록을 위해 특별히 소련의 전문 촬영 인원들을 파견했고 장시간의 총천연색 기록을 남겼지만 화재로 인해 필름들이 모두 소실됐다 한다.

▲ 국민당과의 내전을 종식한 후 1949년 10월 1일 중국인민공화국이 탄생하던 날 개국의식을 치르고 있는 마오쩌둥.

얼마나 후대들에게 남기고 싶은 장면들이었을까. 중국을 집정하고 있는 공산당으로서는 대대손손 그치지 않고 보여 주고 싶었을 역사적 장면들은 온전히 남아 있지 않게 된 것이다. 결국 개국의식의 일부분만이 기록된, 비 내리는 듯 줄무늬가 연신 나타나는 흑백 필름들만 매년 건국기념일에 반복돼 돌아가고 있다. 정말 가지고 갖춘 것 변변히 없이 새로운 나라 중화인민공화국은 출발했다.

새로운 중국은 우리가 이해하고 있던 과거 전통 속의 중국인들이 살았던 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사회체제를 가지고 시작된다. 구 소련의 것을 참고로 헌법을 만들고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의 경험을 학습하고 다시 자신들의 시각을 더해 구축한 그들만의 체제 속에 고유의 사회 문화를 만들어 오며 60여 년을 지내 왔다.

그리고 중국과 중국인들의 많은 것들이 지금의 모습처럼 변모되기 시작한 때는 그리 오래 전이 아니다. 1978년에 시작했지만 지지부진하던 개혁개방이 1992년 등소평(鄧小平․덩사오핑)의 적극적인 독려를 계기로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서면서다.

최근 20여년 중국에는 중국인들 삶 모습을 이전과 완전히 바꾸어 놓는 계기가 되는 많은 일들이 집중적으로 이어진다. 1997년 등소평이 세상을 떠나면서 마오로부터 이어졌던 제2대 지도자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었지만 중국의 경제 발전을 주도했던 그의 업적은 그 후로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WTO에 가입, 경제가 더욱 강대해질 수 있는 세계무대에서의 확고한 위치를 다졌다. 베이징 올림픽과 상하이 엑스포를 유치하고 치러내며 세계인들에게 변모하는 중국을 한껏 알렸다. 홍콩과 마카오를 차례로 반환 받으면서 중국 민족의 자존을 회복하며 활짝 웃었다. 유인우주선을 연이어 성공적으로 쏘아 올리는 한편 유인 잠수정으로 7000m 이상 심해까지 탐험하며 ‘과학 중국’을 과시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민들의 삶의 질에 직접적으로 큰 영향을 미친 제도의 변화가 있었다, 바로 사유 재산을 인정하고 보호하는 법률 제정이다. 기원전 춘추시대를 시작으로 2600년을 이어져왔던 농지 경작에 관한 세금인 농업세도 전면 폐지되며 중국 인민의 절대 다수인 8억명 농민들의 삶의 모습에도 변화를 주었다.

불행도 있었다. 온 나라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사스’라는 바이러스의 공포를 감내해야 했고 10만명 가까운 인명이 희생된 사천(四川․쓰촨)성의 대지진도 겪었다. 이 모두 오늘도 우리가 제주도에서 만나고 있는 중국인들이 근 20년 사이 줄줄이 겪고 변화한 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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