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따라 이야기 따라 6]
제주 유학교육 힘쓴 김진용 기린
‘명림로·명도암동·서길’

제주시 봉개동에는 ‘명림로’와 ‘명도암동길’, ‘명도암서길’이라는 도로명 주소가 있다. 이 세 곳을 통틀어 ‘명도암’이라고 한다. 지금으로부터 약 350여년 전 조선 중기 유학자이자 문신이었던 김진용(1605~1663)은 결혼한 뒤 처가가 있는지금의 명도암에서 살았다. 명도암은 동쪽과 서쪽으로 길이 두개 나있는데, ‘명도암동길’과 ‘명도암서길’은 김진용 선생의 호인 명도암(明道菴)에서 따왔다고 한다.

명림로는 봉개에서 명도암을 지나 비자림까지 연결되는 도로라는 뜻이다. 김진용은 제주 교육기관의 효시(嚆矢)라 할 수 있는 장수당(藏修堂)을 세우는 데 큰 공을 기울였다. 먼 훗날 장수당은 귤림서원으로 발전해 제주의 대표적인 서원으로 자리잡았다.

 

제주교육기관 시초 장수당 건립에 '큰 공'

재정적 지원으로 유생교육 '버팀목'역할

위패 1831년 영혜사서 2007년 향현사 안치

기거터에 후손세운 유허비 문화재지정 신청

 

▲본관은 광산... 1605년 구좌읍 태생

1605년(조선 선조 38년)에 태어나 1663년(조선 현종 4년)에 사망한 김진용은 본관은 광산(光山)으로, 제주시 구좌읍 한동리에서 태어났다. 김진용은 제주 입도조(入島祖) 김윤조(金胤祖)의 8세손으로, 어모장군(禦侮將軍) 김귀천(金貴泉)의 현손이고, 부친 교생(校生) 김경봉(金景鳳)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김진용은 결혼한 뒤 처가가 있는 현재 제주시 봉개동에서 살았다.

광해군의 실정을 비판하다 제주로 유배온 간옹(艮翁) 이익(李瀷)에게 글을 배운 김진용은 경서에 밝고 행실이 정결(淨潔)했다고 한다. 인조 12년인 1634년. 생원과 진사를 뽑던 과거시험인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김진용은 조선의 최고 교육기관인성균관(成均館)에 진학했지만, 그 뒤 다른 벼슬을 하지 않고 다시 제주로 돌아와 후생을 가르치기로 마음먹는다.

▲현 오현단 자리에 제주 교육기관 시초 ‘장수당’들어서다

지금의 오현단 자리에는 제주 교육기관의 시초인 장수당이 있었다. 이는 현종 1년(1660)에  목사 이회가 김진용의 조언으로지은 것이다. 김진용은 이회에게 이 같이 말했다고 한다.

“사또(使道)께서는 여러 유생을 불러 모아 공부를 시키셨습니다. 유생들은 부지런히 문학을 배우게 있습니다. 하지만 사또의 임기가 얼마 남지 않으셨습니다. 사또가 가시면, 유생들이 다시 의지할 데가 없게 될 것입니다.”

이회는 김진용의 말에 “그럼 어찌하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김진용은 “제주성(成) 남쪽에 버려진 터가 하나 있다”며 “그 집은 바로 옛날 판윤(判尹) 고득종이 살았던 곳이다. 그의두 아들도 문과에 합격했다고 하니, 본디 이름난 터가 분명하다”고 아뢰었다.

또한 “몇 동의 집을 짓고, 약간의 책과 양식이 있으면 유생들에게 큰 힘이 될 것”이라고 했다.

집터를 본 목사 이회는 아주 흡족해 했다고 한다. 장수당이 지어진 뒤, 유생 35명은 이들의 도움으로 교육을 받았다.

장수단은 ‘항상 학문에 뜻을 품고서(藏), 중지하지 않고 닦아 익힌다(修)’는 구절을 따온 것으로 전해진다. 김진용은 콩150곡, 쌀 50곡, 보리 50곡 등을 지급, 재정을 지원했다.

6년 후인 1666년. 조광조와 함께 사림파의 대표적인 인물 중 한명인 충암(沖菴) 김정(金淨)을 봉향하기 위해 세운 충암묘가장수당 남쪽으로 옮겨지면서, 이 곳에는 사당과 학사가 갖춰진 ‘귤림서원’이 세워졌다고 한다.

하지만 고종 8년인 1871년 흥선대원군이 ‘서원철폐령’을 내리면서, 귤림서원이 철회됐다. 그러다 1892년 유림 김희정 등이중심이 돼 귤림서원 자리에 비를 재건하고, 그 앞에 석단을 만들어 오현단이 생겼다. 오현은 제주의 교육발전에 공헌한 5명(충암 김정·규암 송인수·청음 김상헌·동계 정온·우암 송시열 선생)을 기리는 제단이다.

김진용은 후학 양성에 매진하다 1663년에 생을 마감했다. 그로부터 약 170년이 지난 순조 31년(1831)년에 이예연 목사가 김진용의 업적을 기려 그의 위폐를 영혜사에 모셨다. 그의 위폐 역시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회됐다가, 2007년이돼서야 향현사에 위패를 새롭게 안치했다.

▲현재 이 곳엔 무엇이 들어섰을까?

이 곳을 가는 길은 간단하다. 우선, 차량 자동 항법 장치(CNS : Car Navigation System, 이하 네비게이션)를 통해 대기고등학교까지 가면, 건너편에 ‘봉개마트’와 ‘번영마트’등을 찾을수 있다. 여기에서 조금 더 쭉 가다 보면 ‘절물자연휴양림’이라고 적힌 안내판이 보인다. 안내판을 따라 우회전을 해 차로 2~3분 가다보면 명도암동길과 명도암서길이라고 적힌 도로명 주소가 보인다. 이 인근에는 명도암 마을회관과 안세미가든, 명도암곰탕 등이 있다.

▲“할아버지 기린 유허비, 문화재로 지정되길 바란다”

김윤희 광산김씨대교동파종친회장은 본지와의 통화에서 “할아버지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봉개동에 위치한 안세미 오름 근처에 후손들이 세운 유허비가 있다”며 “이 곳은 할아버지가 기거하셨던 곳”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김 회장은 “지난해 5월 유허비를 문화재로 지정해달라고 ‘향토문화유산지정신청서’를 제주도에 제출한 바 있다”면서 “제주도로부터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이번 보도를 계기로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널리 퍼지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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