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춘할망’ 포스터 봤다며
서울서 걸려온 친구의 전화
‘이름 콤플렉스’ 새록이 돋아나

해녀 등 제주 무대로 한 영화
무조건적 믿음과 사랑으로
‘가족의 의미’ 새삼 일깨워줘

영화 ‘계춘할망’이 개봉되기 전, 서울에 살고 있는 고향 친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아주 오랜만이라 웬일이냐고 물었다. 차를 타고가다 시내버스 광고판을 보고 갑자기 생각이 났다고 했다. 시내버스에 부착된 광고는 다름 아닌 ‘계춘할망’ 포스터였다.

한편으론 반가우면서 다소 ‘민망’하기도 했다. 그 민망함의 이면엔 이름에서 비롯된 일종의 ‘콤플렉스’가 여태 자리잡고 있었는지 모른다.

유년(幼年) 시절 ‘계춘’이란 이름이 촌스럽고 창피했다. 남자보다는 여자 이름에 가깝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제주시 소재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도 고민 아닌 고민은 계속됐다. 편지를 부치러 관덕정 옆 제주우체국에 들렀을 때, 나는 다시 한 번 얼굴이 빨개졌다. 창구에 앉아있던 여자 직원의 이름이 바로 ‘김계춘’이었다. 다행스럽게 얼굴도 이쁘고 웃는 모습이 너무 고와 ‘안도의 한숨’을 내쉰 바 있다.

급기야 용기를 내어 완고한 아버님께 개명(改名)을 요구했다. 당초부터 큰 기대는 안했지만 결과 역시 예상을 벗어나진 않았다. 그러나 불호령 대신 내 이름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줬다. 계수나무(桂)는 ‘승리’를 뜻하고 봄(春)은 ‘만물이 소생하는 계절’이니, 한자로 풀이하면 아주 좋은 이름이라고 하셨다. 할아버지께서 직접 작명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름과 연유된 ‘콤플렉스’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게 된 것은 70년대 말 육군 논산훈련소에 입소했을 때였다. 마침 정훈(政訓)시간이었는데 ‘높으신 분’이 시찰을 온다고 해 우리는 숨죽여 기다렸다.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서더니 갑자기 내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는 지휘봉으로 내 모자를 들어올렸다. 바짝 긴장한 채 고개를 든 순간 ‘김계춘’이란 이름 석자가 확 눈에 들어왔다.

굵은 음성이 내 귀를 울렸다. “자네도 마음 고생이 심했겠구먼, 그런데 이름에 너무 연연하지 말 게. 나 같은 사람도 있지 않은가”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그 높으신 분은 당시 정훈감이었던 김계춘 대령 신부(神父)였다.

엊그제(28일) 제주시 탑동해변공연장에서 ‘계춘할망’ 영화를 봤다. 제주도 문화정책과에서 도민들을 위해 특별히 마련한 야외 상영회였다. 비가 그친 저녁 8시라 조금은 쌀쌀했지만 해변공연장은 영화를 보러온 사람들로 거의 들어찼다.

영화는 노오란 유채밭에서 시작해 유채밭으로 끝난다. 그만큼 전편에 걸쳐 우리 눈에 익은 제주의 아름다운 풍광들이 펼쳐진다. 계춘할망(윤여정 분)과 손녀인 혜지(김고은 분)가 주인공이지만 ‘제주’ 역시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이었다.

‘계춘할망’은 제주해녀 할머니를 통해 모성(母性)을 일깨우며 나름의 반전으로 치유와 반성, 성장을 이야기한 영화다. 줄거리는 대강 이렇다. 계춘할망은 평생을 물질로 살아온 해녀(海女)다. 남편과 아들을 먼저 보내고, 며느리는 어린 딸과 시어머니를 놔둔 채 외지로 떠나 버렸다. 혈육이라곤 손녀 뿐으로 할망은 혜지만 바라보고 산다.

그러던 어느 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녀를 시장통에서 잃어버린다. 이후 사는 것이 사는 게 아닌 12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리고 고등학생이 된 혜지가 갑자기 나타난다.

삶의 의욕을 다시 되찾은 계춘할망은 동네잔치를 열어 혜지를 맞이한다. 하지만 ‘불량 청소년’의 아우라를 풍기는 혜지에 대한 마을사람들의 눈이 곱지만은 않다. 그럼에도 할망은 혜지가 어떤 모습이든 살아 돌아와 준 것이 너무나 고맙고 감사하다.

영화는 혜지의 배신 등 반전(反轉)으로 계춘할망과 관객들을 아프게 하지만, 결국 혜지는 모든 잘못을 뉘우치고 우리 곁으로 돌아온다. 피폐하고 메말랐던 혜지의 마음 속에 뿌려진 따뜻한 사랑의 씨가 싹튼 결과다.

이 영화를 관통(貫通)하는 것은 무조건적인 믿음과 무조건적인 사랑의 힘이다. “내가 네 편 해줄 테니 너는 네 원대로 살라”고 혜지에게 들려주는 계춘할망의 대사는 ‘하늘을 품은 바다’를 닮았다.

영화 ‘계춘할망’은 자극적인 영화만이 살아남는 극장가에 작지만 큰 울림을 준 ‘착한 영화’다. 특히 윤여정과 김고은의 찰떡궁합 연기가 돋보였다. 비록 ‘캡틴아메리카: 시빌워’나 ‘곡성’ 등 폭력을 내세운 대작들에 밀려 흥행성적은 그다지 좋지 않지만, 가족의 의미를 재삼 우리에게 일깨워줬다. 아이들 손을 잡고 한번쯤 영화관 찾기를 권한다.

참, 사족을 덧붙인다면 테왁에 쓰여진 계춘할망의 성(姓)은 ‘김’이 아니라 ‘홍(洪)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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