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추념일 행불인 묘역 6살에 온가족 잃은 비극
통한의 70년 김태희씨 사무치는 그리움에 눈물

▲ 3일 행불인 묘역에서 만난 김태희 씨 가족이 참배하고 있는 모습. 오수진 기자 rainmaker@jejumaeil.net

“난 여기만 오면 부애(부아)가 나…국가에서 그랬으면 국가가 책임져야지, 대체 이런 나라가 어디 있나.”

제69주년 4·3희생자 추념식이 열린 3일, 행방불명인 묘역에서 만난 제주4·3 희생자 유족 김태희씨(75)는 이름만 덩그런히 적힌 묘비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다 긴 숨을 내쉬며 먼 하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까마득히 어렸던 여섯 살 나이에 남원면 의귀리에서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 동생 모두를 하루 아침에 잃은 그였다. 행불인 가족으로 살면서 혼자 살아 남았다는 것이 먼저 간 가족에게 죄스러움이었기에, 그에게 있어 오늘은 늘 답답하고 화가 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간 아버지가 정뜨르비행장에서 죽임을 당했고, 집에 불을 지른 군인들이 또다시 가족들을 죽였다. 국가가 그랬으면 시신이라도 돌려줘야 하는 거 아닌가. 행불인. 그게 대체 무슨 이름인거냐.”

김씨는 시간은 흘러 어느덧 70년을 바라 보고 있지만, 변한 건 하나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국가폭력에 의한 희생임을 알고 있음에도, 국가의 배보상은 물론 유해 발굴에 대한 진척도 없다”며 당일 대선주자들의 추념식 방문 모습을 보고 “국가문서보관소를 뒤져서라도 제주 행불인들의 유해를 찾아주는 노력을 해달라”고 말했다.

그렇게 김씨는 진실이 거세 됐음을 증명하는 현실의 묘비 앞에서 지금껏 아무것도 하지도, 해낼 수도 없었던 무능력한 자신의 모습에 고개를 떨궜다.

“내 동생은 3살이었다.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를 나이다. 3살이 공산당을 알았겠냐. 왜 국가가 평화롭게 살고 있던 우리 가정을 파괴해야만 했던건가.”

옆에서 김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만 있던 고모 김선(88) 할머니는 “여기를 이제 몇년이나 더 올 수 있을까.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죽기 전에 오빠의 모습을 다시 볼 수나 있었으면 좋겠네”라고 옅은 숨을 내쉬며 소망을 전했다.

한편 제주4·3평화공원 내 행불인 묘역에는 이렇게 김씨 가족처럼 4·3으로 희생됐지만, 시신을 찾지 못한 3891기의 묘비가 조성돼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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