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식평화’ 염원한 소설 속 주인공
선거때 혈서 쓰며 설득했건만
민초들 선택은 폭력 기반한 ‘육식’

30일 안으로 다가온 ‘장미대선’
‘대세론’ 가라앉고 예측불허 양상
시류에 휩쓸려선 악순환 되풀이


 

아주 오래 전에 이제하의 소설 ‘초식(草食)’을 읽은 적이 있다. 그의 작품은 매우 난해한 편에 속한다. 구체적인 줄거리나 명백한 테마를 배제하며 초현실적 비유를 자주 사용한다. ‘초식’ 역시 민주의 실체가 아닌 민중을 실체로 착각한 인물의 파탄을 그리고 있다.

소설의 줄거리는 대강 이렇다.

돈 한 푼 없이 매번 국회의원에 출마하는 서광삼(徐光三)은 민주주의 신봉자다. 늘 꼴지 성적의 수모를 당하면서도 의원이 꼭 되고야 말겠다는 신념을 버리지 못한다. 직업이 얼음 도매인인 그는 선거를 앞두고 ‘초식’에 돌입하면서 자전거에 도시락을 매달고 선거유세에 나선다.

선거 참모라고 해야 학교에 다니는 아들인 ‘나’와 농사짓는 몇몇 친척이 전부다. 그럼에도 서광삼은 코흘리개 포함 열 손가락을 다 채우지 못하는 유세장의 청중 앞에서 사자후(獅子吼)를 토하지만 언제나 실패로 끝난다. 그가 기필코 선량(選良)이 되려는 것은 ‘고기 먹는 자’들의 무자비한 폭력을 저지시키고, 이 땅에 ‘풀 먹는 자’의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다.

4·19 혁명이 일어나자 서광삼은 3년 전에도 갔던 도수장(屠獸場·도축장)을 다시 찾아간다. 도수장은 폭력의 근원인 동시에 하층민의 고통을 집약적으로 재현하고 있는 장소다. 도수장 주인 앞에서 그는 광목에 ‘草’자를 혈서로 쓰며 더 이상 소를 죽이지 말라고 설득한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콧방귀와 냉대뿐이었다.

그 이듬해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다. ‘혁명’을 축하하기 위해 공민학교 운동장에는 커다란 가마솥이 걸리고 도수장 주인이 직접 소 한 마리를 잡는 살육의 잔치가 벌어진다. 그동안 어둠 속에서 숨죽이며 이뤄졌던 살육(殺戮)은 이제 모든 시선이 주목하는 백주 대낮에 공공연히 자행된다.

서광삼이 그토록 설득하려 할 때는 완고한 몸짓으로 거부하던 ‘민초(民草)’들이 운동장에 구름처럼 모여 도수쟁이가 소의 정수리로 날렵하게 내리찍는 도끼 솜씨에 열광했다. 그리고 나서는 익힌 고기 한 점과 삶은 뼈다귀 국물 한 사발씩을 얻어 마시며 희희낙락 거렸다.

고대 아테네를 대표한 것은 ‘민주주의와 철학자 플라톤’이었다. 하지만 플라톤은 민주주의를 극도로 혐오했다. 단지 시민이란 이유로 참정권을 부여한 것은 돼지에게 진주를 던져주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 아테네 시민들이 소크라테스를 단죄해 독배(毒杯)를 들게 한 것도 허울 좋은 민주주의 탓이라는 논거였다.

대신 그는 민주정에 대한 비판의 대안으로 공화정(共和政)을 내세웠다. 매우 혹독한 훈련을 거친 한 사람의 지도자, 즉 철인(哲人)에 의해 통치되는 국가를 원했다. 민중들 다수가 숱한 토론을 거쳐서 도달한 결론도 한 철학자의 통찰을 당할 수 없다는 것이 플라톤의 생각이었다. 그 기저엔 민중을 무지하고 몽매한 어린 양떼로 내려다보는 시선이 깔려 있다.

오늘날의 시각으로 볼 때 이 같은 주장에 공감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플라톤의 논리를 인정하면 그 고매한 철인 왕은 결국 짐승 떼거리를 몰고 다니는 가축 왕에 지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라톤의 생각 중에는 적어도 한 가지 시공(時空)을 초월해서 우리를 공감케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민중들이 반드시 그들의 머릿수만큼 현명한 것은 아니라는 것. 그들은 쉽게 설득당하고 쉽게 조작되며, 쉽게 분개하고 쉽사리 망각한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정치사(선거사)를 보면 이 같은 진면목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과연 한국의 유권자들은 그동안 종횡으로 얽힌 연줄과 파벌 그리고 당근과 채찍에 좌우되지 않고 능력이나 소신 등을 보고 투표에 임해왔는가.

이제하의 소설에 나오는 것처럼 ‘초식’은 완고하게 거부하며 ‘육식(肉食)’에는 열광했던 그 시절과,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다른 것은 무엇인지 한 번쯤 되돌아볼 일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 등 오랏줄을 받은 대통령들을 조금은 즐기는 듯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게 바로 우리의 모습이다. 우리는 그들의 타락이 저 지경에 이르기까지 무엇을 어떻게 해왔는가.

제19대 대통령을 뽑는 ‘장미대선’이 30일 안으로 다가왔다. 기세등등하던 ‘대세론(大勢論)’이 물거품처럼 꺼지면서 향후 대선 정국의 결말은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게 됐다.

우리의 미래는 ‘철인 왕’이 아니라 유권자 저마다의 현명(賢明)한 선택에 달렸다.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하고 시류(時流)에 휩쓸려서는, 지금과 같은 악순환만 되풀이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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