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종1품 숭정대부 제수
제주인 中 가장 높은 벼슬
김만덕은 알아도 김만일 잘 몰라

임진왜란 등 국가위기 때마다
戰馬 등 헌상한 호국영웅
‘男 만일·女 만덕’ 제주표상으로

 

 

지난 21일 제1회 ‘호국영웅 헌마공신 김만일상’ 시상식이 있었다. 이날 대상의 영광은 평생 말을 키우며 지역발전을 위해 봉사해온 고경수씨(87, 조천읍 선흘리)에게 돌아갔다. 또 특별공로상엔 한국인 제1호 수의사로 우리나라 축산업 발전에 초석을 놓은 고(故) 이달빈씨(서귀포시 중문동)가 선정됐다.

하지만 ‘의녀 김만덕(金萬德)’은 잘 알아도 ‘김만일(金萬鎰)’은 아직 제주도민들에게도 다소 낯선 이름이다. 그가 조선시대 헌마공신(獻馬功臣)으로, 역대 제주인으로는 가장 높은 벼슬인 종1품 숭정대부를 제수받았다는 사실을 알면 대부분 깜짝 놀란다.

종1품은 정1품 다음의 품계 서열 2위다. 당시 인조 임금이 김만일에게 숭정대부를 제수하자 신하들 사이에서 대우가 지나치다는 말이 나왔으나, 전마(戰馬) 헌납을 중요시여긴 인조에 의해 그대로 시행됐다.

김만일(1550~1632)은 경주 김씨 입도조인 김검룡(金儉龍)의 7세손이다. 현 서귀포시 남원읍 의귀리 출신이다. 그는 일찍이 무과에 급제해 1582년(선조 15년) 방답진 첨절제사(종3품 지방 무관직)를 역임한 후 제주에 내려와 말의 번식과 개량에 힘쓰며 명마를 생산하는데 진력했다. 특히 임진왜란과 정묘호란 등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당시로선 군수품(軍需品)인 전마용 말 수천여필을 국가에 헌상해 국난극복에 크게 기여했다.

김만일의 헌마가 시작된 임진왜란의 경우를 보자. 왜란이 한창이던 1594년(선조 27년) 조정은 전투용 말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 전쟁의 피해로 전국 대부분의 목장이 제 기능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전마를 보충할 유일한 방법은 제주에서 말을 가져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국영 목장에서 차출하는 말만으로는 크게 부족했다. 결국 가장 많은 말을 소유했던 김만일에게 손을 내밀었고, 그는 기꺼이 전마 500필을 나라에 바쳤다. 당시 좋은 말 한 필은 노비 3명, 또는 포목 50동(同)에 해당할 정도로 값비쌌다. 그 뒤에도 광해군과 정묘호란이 발생한 인조 대에도 김만일의 헌마는 계속됐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1594년(선조 27년)을 필두로 광해군 때 4번, 1627년(인조 5년) 등 누란(累卵)의 위기가 닥칠 때마다 수 천 필의 전마 등을 감당해온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공로로 김만일은 조정으로부터 높은 관직과 포상을 받았다. 1618년(광해군 10년)에는 종2품 가선대부 오위도총부 부총관을, 그 뒤 정2품 자헌대부 동지중추부사를 제수받았다. 그리고 1629년(인조 6년)에는 파격적으로 종1품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올랐다.

파격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김만일의 큰아들 대명에게는 수령을 제수하여 보성 군수에 임했고, 둘째 아들 대성에게는 당상관 벼슬을 주었다. 또 손자에게도 선전관을 제수하면서 제주도의 변장(邊將)으로 임명했다.

특기할 점은 제주도 목장의 하나인 산마장(山馬場)을 감독하는 감목관을 경주 김씨 집안에서 대대로 세습하도록 특전을 베풀었다는 것이다. 당시 관영 목장인 관둔(官屯)을 관리하는 직책인 감목관은 판관이나 현감이 겸임하는 것이 관례였다. 하지만 산마장만은 김만일 집안의 감목관(監牧官)에게 감독권을 줬다. 감목관은 종6품으로 현감과 같은 품계의 직책이었다. 그것도 집안 대대로 세습하는 은전(恩典)이었으니 가히 파격이 아닐 수 없다.

초대 감목관으론 김만일의 셋째 아들인 대길이 임명되었다. 그 후 집안사람들 가운데 적당한 인물을 6년마다 한 번씩 문중회의서 추천하면 조정이 감목관으로 임명했다. 이후 218년간 ‘산마 감목관’은 경주 김씨 집안의 전유물이 되었으며, 이 기간 나라에 헌상한 전마 등은 무려 2만여 필(문헌상으론 1만9380마리)이 넘는 것으로 전해진다.

더욱이 감목관을 지낸 김남헌은 마정관리는 물론 녹봉까지 절약해서 구휼에 쓸 곡물 1,340여섬을 조정에 헌상했다. 이때 영조대왕이 옷 한 벌을 하사하는데, 오늘날 마을명인 ‘옷귀(의귀)’란 이름도 여기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말(馬), 헌마공신 김만일과 말 이야기’란 역사소설을 쓴 권무일은 “전란의 와중에서 김만일은 제주의 위상을 높이고 정체성을 확립하는 등 제주의 가치를 만방에 알린 거인(巨人)”이라고 평가했다.

제주여성의 표상이 김만덕이라면, 김만일을 제주남성의 표상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다. 이름하여 ‘남(男) 만일-여(女) 만덕’이다. 자선의 상징이 된 의녀 김만덕과 호국영웅 헌마공신 김만일의 생애와 업적은 우리가 높이 평가하고 기려도 결코 지나침이 없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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