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2달 밖에 남지 않은 11월
월동준비로 바빴던 시절
한해를 마무리해야 하는 시기

미흡한 결과·성과에 실망할 수도
하지만 감사로 마무리 노력
무수한 봄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분주함으로 또는 게으름으로 벌써 한해의 많은 시간들을 보내고 11월을 맞이했다. 추수가 끝난 들판은 빈 바람만 소리 없이 쓸쓸하게 가득하고, 단풍으로 곱게 물들었던 산야는 마른 낙엽이 바람에 쫓기며 가을을 뒤따르느라 분주하다.

11월은 다양한 수식어가 붙는 많은 달들과 달리 각별한 별명도 없고 특별한 기념일도 공휴일도 없다. 직장인에겐 공휴일도 없이 한 해의 업무를 마감하며 폭주하는 일감에 야근이 일상이고, 수험생에겐 단 하루의 시험으로 평생을 시험에 들게 하는 날이 자리하고 있다. 수험생 부모는 그동안 소홀했던 새벽기도회를 향해 어둠 속에 부서지는 가랑잎을 밟으며 두 손을 모으며 종종걸음 친다.

마냥 긴 줄 알았던 해는 어느덧 뉘엿뉘엿하고 갈 길은 아직 먼 것 같아 초조한 마음에 허둥거리는 내 모습이 11월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계절 탓일지도 모르겠다. 이 달이 지나면 달랑 한달 남은 12월은 이미 각자의 결산을 마치고 파티를 즐기던지 좌절을 달래며 술잔을 기울일 것이다. 그 잔이 축배든 쓴잔이든 간에 곧 겨울은 내려올 것이고 봄을 기다리며 희망의 꿈을 다시 키울 월동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지금은 특별히 월동준비라는 개념이 흐려졌지만 불과 얼마 전만 하더라도 11월은 빈궁한 겨울을 나기위한 분주한 날들이었다. 겨우내 묻어두고 먹을 김장을 담그고 방바닥을 덥혀 가족의 체온을 지켜줄 연탄을 들이는 과업은 부모의 가장 큰 대사였다.

부엌과 창고를 매운 연탄과 뒤꼍에 묻은 항아리는 이웃집과 양을 비교해가며 한 해의 결실을 은근히 과시하기도 했던 것 같다. 오와 열을 맞춘 연탄의 높이와 다양한 종류의 김치항아리가 확보되면 가장인 아버지는 뿌듯해하셨고 어머니는 마음을 놓았다.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취업전선에 뛰어든 누이들은 월급을 모아 사들고 온 식구들의 내복과 전기구이 통닭을 내밀며 수줍어했고 겨울 밤 야참으로 먹을 김치말이 국수와 동치미 국수 생각에 침이 고이곤 했다. 김장은 이웃이 서로서로 품앗이를 해가며 담가 나눠먹고, 겨울을 나다 모자라는 연탄은 서로 빌려주며 이웃과 함께 온기를 나누었다. 11월은 그렇게 봄을 기다리며, 다시 희망을 꿈꿀 준비를 하는 준비와 다짐의 달이었던 것이다.

준비와 다짐을 반복하며 쉼 없이 달려온 인생에서 우리는 나름의 결실도 얻었다. 하지만 세상은 녹녹치 않아서 100세 시대라고 인생의 시간은 길어 졌으나 50대에 벌써 일을 내려놓고 새로운 일을 찾아야 하는 상황을 흔히 목격하게 된다.

삼삼오오 친구들을 만나면 “열심히 살았는데 노후 준비가 부족했어!” “아직 아이들 공부시켜야 하는데 걱정이네!” 하소연을 쏟아놓는다. 앞으로 무엇을 하고 살지 무엇을 잘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을 이야기 하게 된다.

결국 “다잘 될 거야”라고 훈훈하게 마무리하며 잔을 들지만 술맛이 쓰다. 이렇게 중년과 11월은 꽃도 녹음도 단풍도 없는 삶의 전성기를 지나 지금까지 달려온 날들을 되돌아보고 제2막을 준비한다는 의미에서 서로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 차분히 월동준비를 하자!” 생각보다 겨울은 그리 길지 않을 수도 있다. 춥지도 않을 수도 있다. 연탄 보다 화력 좋은 가족이 있고 김치보다 질리지 않는 친구가 있지 않은가!

그러고 보니 11월은 참 많은 희비가 엇갈리며 바람처럼 지나갈 것 같다. 시험의 결과와 한 해의 성과에 실망하지 않을 수 없지만, 아직 젊고, 내년이 기다리니 차분한 월동준비로 건강하게 살아남자.

이제 11월은 더 이상 특징 없고 쓸쓸한 달이 아니라 새로운 준비와 다짐의 달로 다가온다. 싱그럽던 봄과 열정 가득했던 여름, 풍성한 열매를 거두던 가을이 그냥 지나간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이 있었기에 11월의 들판에서 고개 숙이는 감사가 있는 밀레의 만종처럼 우리도 지금까지 삶을 감사로 마무리하고 새로운 씨를 뿌릴 준비를 하자. 우리 인생에 아직 무수한 봄이 기다리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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