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산 증가 불구 ‘창작복지’ 전무
현장 예술인 지원이 ‘제주문화’ 지원

2011년 집주인에게 “남는 김치나 쌀을 부탁한다”는 쪽지를 남기고 세상을 떠난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의 죽음은 이 땅에서 예술로 밥먹기가 얼마나 힘든지를 세상에 알렸다. 이후 예술인의 지위와 가치를 인정한 ‘예술인 복지법’이 시급히 제정되었지만 선언적 의미를 넘어서지 못하는 양상이다. 이후 딱히 예술가들의 빈궁한 처지가 개선됐다거나 창작여건이 좋아졌다는 이야기는 들리지 않는다.

필자는 지난 2013년 10월 도내 문화예술인 224명을 대상으로 ‘문화예술인 지원 및 창작활동 조사’를 한 적이 있다. 응답자의 85%가 ‘작품활동에 있어 경제적 어려움이 크다’고 호소했다. 한 달 수입도 제주 예술인들 중 66%가 최저임금 월 153만원(2013년 시급 4860원)이 안되는 100만원 미만으로 조사됐다.

당시 조사결과를 바탕으로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예술인 복지 증진에 대한 조례’를 대표발의했다. 제주도 행정 역사상 최초로 도정의 목표에 ‘문화’가 포함되고 당연히 지역 예술인 복지에 대한 근본적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2018년 제주특별자치도의 총 재정규모는 5조 297억원이다. 그리고 순수 문화예술예산이 1157억원으로 제주도정 역대 처음으로 1000억원을 넘겼다. 올해 순수 문화예술정책 예산 규모는 4년 전 595억원에 비한다면 가히 2배에 가까이 증액된 것이다. 순수 문화예술 예산 1000억원 돌파는 지역 문화예술인들에게는 너무나 설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예술인 지원은 안타깝게도 창작지원에 한정될 뿐 예술인들이 창작활동에 전념하도록 지원하는 복지예산은 없다.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얘기에 다름 아니다.

오늘날 프랑스는 예술가들이 끼니 걱정 없이 작품활동에 매진할 수 있는, 세계에서 거의 유일한 나라로 꼽힌다. ‘앵테르미탕’이란 제도 때문이다. 프랑스어로 ‘불규칙적’, ‘비정규적’이라는 뜻의 앵테르미탕은 공연·영상예술 분야 비정규직 예술가, 혹은 그들을 위한 실업보험 제도를 말한다. 일거리가 불규칙하게 들어오는 예술가들에게 일정한 소득을 보장해주기 위해 1969년 처음 만들어진 제도다.

프랑스 또한 예술가가 고소득을 보장하는 직업은 아니지만 한국처럼 생계가 걱정돼 예술을 포기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앵테르미탕 덕분이다. 예술가는 매달 버는 돈을 정부에 신고하고 그 절반을 보험료로 낸다. 정부는 신고된 액수를 바탕으로 기준소득을 산출하고 예술가가 수입이 없을 때 그만큼의 소득을 보전해준다.

예술가에게 돌아가는 혜택은 예술의 공공적 가치를 인정하는 사회적 합의에서 비롯된다. 예술작업은 시민의 생활을 풍요롭게 하고 도시를 아름답게 하고 관광객들을 불러오게 하는 공공서비스적 작업이라는 시민들의 공감은 물론 예술가의 사회적 지위를 인정해주기에 가능하다.

하지만 아직도 한국은 예술가 지원에 부정적인 시선이 많다. 자기가 좋아 배고픈 예술의 길을 가는데 왜 소중한 세금으로 도와줘야 하느냐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예술가들의 작품이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도시를 바꾸는 데 기여한다고 하면 생각이 좀 달라지지 않을까 싶다.

이제 제주의 문화는 제주문화예술인들의 개인 몫만이 아니다. 제주를 문화로 풍요롭게 만들고, 더 아름답고 가치 있게 만드는 문화노동자인 예술가들을 격려하는 정책이 나올 때가 되었다.

특히 지역의 정체성을 잘 아는 지역문화예술인들이 작품에 매진할 수 있어야 제주의 영혼과 향토성을 고스란히 담은 향토적 문화가 잘 자랄 수 있을 것이다. 세계적 문화를 벤치마킹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제주만의 고유한 문화를 살리기 위해서 제주현장에 있는 문화예술인들에 대한 지원이야말로 제주색채의 문화를 지원하는 길이 될 것이다.

프랑스만큼은 아니더라도 새해에는 제주에서 더 이상 배고픈 예술가는 없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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