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칸방 살며 이웃돕기 100만원 쾌척
생계지원비 50만원 중 4만원도 기부

 

 

 

민족의 명절 설이 내일이다. 2018년 달력은 이미 2월 중순이지만 아직도 ‘새해’다. 많은 사람들이 설날에 떡국을 한 그릇 먹어야 나이도 한 살 더 먹고 진정한 새해를 맞이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설날은 오랜만에 만난 가족·친지들과 세배를 하고 덕담을 주고받으며 떡국과 맛있는 음식을 먹는 즐거운 명절이지만, 누군가에겐 상대적으로 더 외롭고 가슴 시리는 때이기도 하다.

“내가 아무것도 아닐 때 내 물건을 팔아준 것이 누구냐? 사람이다. 저기 굶주리고 쓰러져 죽어가는 것이 누구냐? 사람이다. 이젠 내가 그들을 도울 차례다”며 나눔의 행동으로 숱한 생명을 구한 ‘김만덕’이 생각난다. 김만덕기념관도 그 정신을 이어받아 꾸준히 나눔을 실천하고 있다.

해마다 연말연시와 명절에는 특히 노인복지시설과 독거노인세대 등을 모신다. 댁으로 찾아가 쌀 한 포대와 생수 한 박스를 드리면 고맙다고 눈물 글썽거리시는 모습에 내민 손이 부끄러울 때도 있다. 언제나 어르신들이 건강하고 외롭지 않게 사셨으면 하는 바람이다.

설을 앞두고 문득 고마운 할머니 한 분이 생각난다. 2009년 10월 17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 사단법인 김만덕기념사업회가 개최한 ‘김만덕 나눔쌀 1만섬 쌓기’ 행사가 한창이었다. 모금 부스의 자원봉사자가 흰 봉투를 하나 들고 상황실로 찾아왔다. 봉투 겉면에는 ‘박말다’라고 쓰여 있었고, 안에는 100만원 짜리 수표 1장이 들어있었다.

자원봉사자는 남루한 차림의 할머니가 찾아와 내민 봉투의 큰 금액에 깜짝 놀라 이름과 연락처를 물었으나, 극구 사양하며 자리를 떴다고 했다. 행사를 마치고 난 후 김만덕기념사업회는 이 할머니를 찾아 인사를 드리기로 뜻을 모았다.

봉투에 쓰인 ‘박말다’라는 이름과 수표 발행 은행지점을 단서로 인근 주민센터·주민들에게 수소문을 한지 두 달이 돼갔을 때 할머니를 찾았다는 연락을 받았다. 주인공은 사직동에 살고 있는 ‘박부자’ 할머니였다. 전화를 드렸더니 “대단한 일도 아닌데 연락을 준 것은 고맙지만, 찾아오지는 말라”며 손사래를 쳤다. 몇 차례에 걸친 설득 끝에 집 방문에 동의하셨다.

김만덕기념사업회 고두심·양원찬 대표와 함께 목도리와 장갑·겨울옷을 준비해 찾아간 할머니의 집은 사직동에서도 형편이 어려우신 분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 큰 길에서 한참을 올라가서 돌고 돌아 당도한 집은 전세 500만원 짜리 단칸방이었다.

방안에 들어서자 우리는 금방 눈시울이 붉어졌다. 추운 날씨, 전기장판에 의지해 한기를 이겨 내고 있었다. 그렇게 홀로 어렵게 살고 있는 할머니가 100만원이라는 거금을 기초생활수급권자인 자신보다 더 어려운 이웃을 위해 기부한 것이었다.

할머니는 행사 당일 ‘김만덕 나눔쌀 1만섬 쌓기’ 생방송을 통해 어려운 이웃을 돕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모인 것을 보고 행사장인 광화문광장까지 한걸음에 달려 나갔다고 했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할머니는 급하게 나가느라 다른 봉투가 없어 헌금봉투에 돈을 넣었다고 했다. 할머니의 세례명이 마르타(말다)였다.

100만원이라는 큰 돈을 어떻게 마련했는지 물었을 때 우리는 다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살고 있는 집이 재개발 예정지역이라 언제 비워줘야 될지 몰라 3년간 차곡차곡 적금을 부어 500만원을 탔는데 그 중의 일부를 기부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전세금 500만원마저도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행복한 유산 캠페인’에 참여해 당신이 세상을 떠난 뒤 기부하기로 약속돼 있었다. 생계지원비 50여만원 중 4만원도 동남아시아 어린이 후원금으로 매달 기부를 하고 있었다.

“나는 나라에서 돈도 주고 도시락도 배달해주는데, 그 혜택마저도 못 받는 사람이 얼마나 많느냐 ”며 자기는 행복하다던 할머니는 이름대로 ‘부자’였다. 올해부터 우리 모두 박말다 할머니처럼 ‘부자’가 되기를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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