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직 지사·총장 등 지도급 인사들
각종 선거판 끼어드는 세태
도민들의 참담함 알고나 있을까

‘6·13 지방선거’도 예외는 아니
고충홍 의장 “원로로 남겠다”
그 다짐 꼭 실천으로 이어지길…

 

 

지난 2000년 4월 13일 치러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때의 일이다. 지금과는 달리 도내 지역구는 제주시와 북제주군, 서귀포시·남제주군으로 나뉘어 있었다. 당시 정치부 기자였던 필자의 취재 대상은 한국병원 근처에 있던 제주시선거구 한나라당(현경대 후보) 캠프였다.

18년 전의 기억이 아직도 또렷하게 남아있는 것은, 그때 선거사무실에서 느꼈던 ‘참담함’ 때문이다. 거기엔 지역에서 내로라하던 두 거물(巨物)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한 분은 대학 시절 은사였던 전직 총장이었고, 또 다른 분은 잠시나마 상사로 모셨던 전직 도지사였다.

근래 들어 ‘총장(總長)’ 직함이 흔해졌지만 그 당시에는 국립 제주대학교 총장이 유일했다. 때문에 ‘지성의 상징’으로 불리었다. 지사 역시 도백(道伯)으로 칭할 만큼 권위가 대단했다. 세칭 ‘지역 내 서열 1~2위’를 지냈던 두 분이 일개 지역구 후보의 ‘후원자’임을 자처하고 앉아 있었으니, 이를 바라보는 기자의 마음은 비통함과 참담함 그 자체였다.

이들의 염려지덕인지 현경대 후보는 결국 16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하지만 그게 끝이었다. 오매불망 국회의장을 꿈꿨던 현 의원은 더 이상의 기회를 잡지 못한 채 끝내 그 꿈을 포기해야 했다. 참고로 그해 4·13 총선 결과 북제주군에선 장정언 후보(새천년민주당), 서귀포시·남제주군은 고진부 후보(새천년민주당)가 각각 당선되어 국회 입성에 성공했다.

흔히들 제주지역에 ‘원로(元老)’가 없다고 말한다. 더러는 원로를 키우기는커녕 배척하는 풍조를 나무라기도 한다. 과연 그럴까. 아마도 ‘아니올씨다!’가 정답에 더 가깝다. 전직 도지사 등 지도층 인사들이 각종 선거판에 끼어들어 어느 한 편을 드는 순간, 그 사람은 스스로가 원로의 자격을 내던진 것이나 마찬가지다.

예컨대 지역에 중차대(重且大)한 문제가 발생해 중재에 나선다고 하더라도 상대 쪽에 있던 사람들이 승복할리 만무하다. 단순한 채무는 당대에 끝날지 모르나, ‘선거 빚’은 후대에까지 이어진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예외 없이 ‘6·13 지방선거’에도 지역의 명망가들이 각 진영의 제주도지사 예비후보 캠프 등에 대거 참여하고 있다. 전직 언론사 사장을 비롯해 전·현직 교수와 사업가, 고위 공무원을 지낸 인사에 이르기까지 출신 성분도 아주 다양하다. 어떤 이는 이념적 지향점이 같아서, 혹자는 제주의 미래 발전을 위해서 등 내세우는 명분(名分)도 각양각색이다. 그러나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아 보인다. 그 ‘속내’를 알 사람은 다 알고 있는 탓이다.

민선(民選) 시대의 가장 큰 적폐는 선거를 통해서 끼리끼리 식의 편가르기가 이뤄진다는 점이다. 직선제가 도입된 이후 형성된 ‘누구 파(派)’라는 초기 계보는 여전히 계속 전승되며 선거 때마다 기승을 부리고 있다. 심지어 현행법상 명시된 정치적 중립을 지키는 공무원은 ‘회색분자’로 몰리기까지 한다.

이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이를 바로잡고 지역의 화합을 도모해야 할 터인데, 스스로가 선거판에 깊숙이 몸을 담고 있으니 기대난망이 아닐 수 없다. 모든 면에서 경험 풍부한 원로는 많으나 ‘진정한 원로’는 없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고충홍 제주도의회 의장이 이달 12일 “정치 후배들에게 길을 터줄 수 있어야 한다”며 6·13 지방선거 불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고 의장은 “여전히 불출마를 말리는 분도 있고, 더 할 수도 있고, 더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지만 정치 후배들이 만들어갈 연동의 미래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며 불출마 심경을 밝혔다.

특히 고충홍 의장은 “제주에 원로가 없다는 지적이 많은데, 비정치적인 활동을 하면서 제주의 원로로 인정받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의장 임기가 끝나면 정치활동을 하지 않겠다고 한 만큼 당적 또한 갖지 않겠다고도 덧붙였다. 그 다짐이 공허한 말이 아니라 지속적인 실천으로 이어져 ‘새로운 원로상(像)’을 만드는데 앞장서길 바란다.

한쪽으로 치우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것이 ‘중’이요, 늘 평상심을 유지하는 것을 ‘용’이라 했다. 그러기에 중용(中庸)은 뚜렷하고 균형이 있는 공명정대함으로, 원로가 갖춰야 할 덕목이기도 하다.

현실 정치에 대해 강하게 집착했던 맹자의 정치 이상은 ‘백성과 더불어(與民)’라는 말로 집약된다. 이번 지방선거에 출마하는 당사자와 그들을 돕는 사람들은 과연 어떠한 생각을 갖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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