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탐라국( 耽羅國) 의 개국신화 삼성혈
고조선 단군신화와 같은 시기 태생
조선 중종때 이수동 목사가 성역화
눈·비가 와도 고이거나 쌓이지 않아

제주에는 제주의 최초(最初) 최고(最古) 최고(最高) 부분이 산재해 있다. 우리가 모르고 지나는 고고학적 최초의 인류 유적과 역사학적,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 처음의 것과 가장 오래된 것, 가장 높은 것 등 많은 부분들이 있다.

제주매일은 기록학적 측면에서 이를 도민들에게 알릴 필요가 있다는 판단아래 제주의 전 분야에서 이를 찾고 보도한다. [편집자주]

삼신인이 태어난 삼성혈 전경. 이들이 수렵생활을 하다가 오곡의 종자와 가축을 가지고 온 벽랑국 삼공주를 맞이하면서부터 농경생활이 비롯됐으며, 탐라왕국으로 발전했다고 전한다.
삼신인이 태어난 삼성혈 전경. 이들이 수렵생활을 하다가 오곡의 종자와 가축을 가지고 온 벽랑국 삼공주를 맞이하면서부터 농경생활이 비롯됐으며, 탐라왕국으로 발전했다고 전한다.

삼성혈(三姓穴)은 탐라국 시작의 출발점이다. 

제주를 알고, 이해하고 싶다면 삼성혈부터 들여다봐야한다. 그곳이 제주도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탐라국 개국신화의 장소이기 때문이다.

삼성혈은 4300년 전 고조선의 단군신화와 같은 시기에 세 신이 땅에서 솟아나온 삼성신화(三姓神話)의 장소이다.

제주도지, 제주시의 문화유적, 문화유적총람, 제주의 문화재, 제주시 30년사 등에는 삼성혈에 대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전해진다.

태초에는 사람이 없었다. 고을나, 양을나, 부을나(을나는 예전 지도자, 왕을 칭함) 신선(神人) 세 사람이 한라산 북쪽 기슭 ‘모흥(毛興)’이라는 구멍에서 솟아나왔다. 삼신인은 황량한 땅에서 사냥을 해 가죽으로 옷을 해 입고 고기로 식량을 했다. 그들은 동해 벽랑국에서 오곡의 씨앗과, 송아지, 망아지 등을 가지고 목선을 타고 제주도 동쪽 해상으로 들어온 삼공주를 맞아 혼례를 올렸다. 지금의 성산읍 온평리의 연혼포(속칭 황로알)는 삼신인이 삼공주를 맞이한 곳이다. 혼인지(고양부 시조와 세 공주가 혼인지에 가서 목욕재개 후 혼인한 연못)는 지방문화재 기념물 제 17호로 벽랑국 삼공주를 맞이해 각각 배필로 삼아 혼례를 올렸다는 곳이다. 삼신인이 혼례 후 첫날밤을 지냈다는 신방굴, 삼신인이 도읍을 정하기 위해 사시장올악(한라산 국립공원 중턱)에 올라 거주지를 정했다. 삼사석은 그 때 화살을 맞은 돌로 전해지고 있다. 삼공주가 온 이후에는 자손들이 생기며 탐라국 번영으로 이어졌고 수렵생활에서 농경생활로 넘어갔다.

삼신인이 벽랑국 삼공주와 혼례를 위해 목욕 재계한 연못인 혼인지와 동해의 벽랑국에서 오곡의 종자와 가축을 가지고 온 삼공주를 맞이했던 연혼포, 혼례 후 첫 날 밤을 치른 신방굴, 삼신인이 도읍을 정할 때 쏜 화살이 박혔던 돌인 삼사석.
삼신인이 벽랑국 삼공주와 혼례를 위해 목욕 재계한 연못인 혼인지와 동해의 벽랑국에서 오곡의 종자와 가축을 가지고 온 삼공주를 맞이했던 연혼포, 혼례 후 첫 날 밤을 치른 신방굴, 삼신인이 도읍을 정할 때 쏜 화살이 박혔던 돌인 삼사석.
삼신인이 벽랑국 삼공주와 혼례를 위해 목욕 재계한 연못인 혼인지와 동해의 벽랑국에서 오곡의 종자와 가축을 가지고 온 삼공주를 맞이했던 연혼포, 혼례 후 첫 날 밤을 치른 신방굴, 삼신인이 도읍을 정할 때 쏜 화살이 박혔던 돌인 삼사석.
삼신인이 벽랑국 삼공주와 혼례를 위해 목욕 재계한 연못인 혼인지와 동해의 벽랑국에서 오곡의 종자와 가축을 가지고 온 삼공주를 맞이했던 연혼포, 혼례 후 첫 날 밤을 치른 신방굴, 삼신인이 도읍을 정할 때 쏜 화살이 박혔던 돌인 삼사석.
삼신인이 벽랑국 삼공주와 혼례를 위해 목욕 재계한 연못인 혼인지와 동해의 벽랑국에서 오곡의 종자와 가축을 가지고 온 삼공주를 맞이했던 연혼포, 혼례 후 첫 날 밤을 치른 신방굴, 삼신인이 도읍을 정할 때 쏜 화살이 박혔던 돌인 삼사석.
삼신인이 벽랑국 삼공주와 혼례를 위해 목욕 재계한 연못인 혼인지와 동해의 벽랑국에서 오곡의 종자와 가축을 가지고 온 삼공주를 맞이했던 연혼포, 혼례 후 첫 날 밤을 치른 신방굴, 삼신인이 도읍을 정할 때 쏜 화살이 박혔던 돌인 삼사석.
삼신인이 벽랑국 삼공주와 혼례를 위해 목욕 재계한 연못인 혼인지와 동해의 벽랑국에서 오곡의 종자와 가축을 가지고 온 삼공주를 맞이했던 연혼포, 혼례 후 첫 날 밤을 치른 신방굴, 삼신인이 도읍을 정할 때 쏜 화살이 박혔던 돌인 삼사석.
삼신인이 벽랑국 삼공주와 혼례를 위해 목욕 재계한 연못인 혼인지와 동해의 벽랑국에서 오곡의 종자와 가축을 가지고 온 삼공주를 맞이했던 연혼포, 혼례 후 첫 날 밤을 치른 신방굴, 삼신인이 도읍을 정할 때 쏜 화살이 박혔던 돌인 삼사석.

고·양·부 삼성사재단 고성근 서무계장은 “제주의 뿌리는 삼성혈 자체가 제주의 시작이며 탐라국 발상지다. 주몽, 박혁거세는 알에서 태어나오는 신화다. 제주도의 삼성신화는 전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용출신화”라고 자부심을 내비쳤다.

삼성혈은 제주시 삼성로 22에 위치한 산림형 유적지다. 1890년 고종 9년부터,  최근까지 지붕, 숭보당 단청 등을 보수하고 전서문 복원 및 혈단문을 복원했다. 
삼성혈의 역사를 보면 제주도는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영향권에 있었다. 그 후 통일 신라가 되면서 탐라국이라는 단어를 쓰게 된다. 탐라(깊고 아주 먼 바다), 즐겁게 삶을 산 제주도 사람들이란 뜻을 탐라라는 단어에서 엿볼 수 있다. 1211년(희종)에 탐라를 제주로 개칭했다.

삼성혈이 성역화된 것은 1526년(중종) 이수동 목사로부터 기인한다. 그 후 제례는 양력 4월 10일에 춘제, 10월 10일에 추제를 지낸다. 12월 10일에는 제주도민이 건시제로 혈단에서 지내는데 초헌관은 도지사로 선임한다.

삼성사재단 양동현 관리부장은 “제주도가 옛날에는 환경이 열악했다. 바람만 불고 농사를 할 수 없어 신에게 의자하며 기도하고 해서 버티고 산거다. 그러다보니 '당오백 절오백'(제주는 가는 곳마다 절 아닌 곳이 없을 정도로 절이 많고 당집이 많음) 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그만큼 살기가 힘들어서 안식을 찾았던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혈은 4300년을 버티는 동안 부침을 겪었다. 양씨종친회는 1962년 재단 명칭을 변경하면서 정기총회가 개최되지 않아 현재의 '고양부'라고 표시된 재단명칭 및 인증취소 이사회 결의는 무효라며 소송을 제기 재판부로부터 '삼성사재단'으로 하라는 제안을 받았다.

역사를 버티는 동안 시조의 시작점은 어느 새 서열의 문화로 변질되고 있었다.

탐라국의 개국신화인 삼성혈은 비와 눈이 많이 와도 쌓이거나 고이지 않으며 수백 년된 고목들이 혈을 향해 고개를 숙여 경배하듯 가지를 늘어뜨린 나무들이 장관을 이룬다.

삼성혈은 현재 한반도에서 오래된 문화 유적으로 1964년 6월 10일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 134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제주 최고로 오래된 문화유적지, 삼성혈(三姓穴). 이곳은 제주의 시작을 알리는 소중한 제주의 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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