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제주도에 진정한 봄은 언제 도래할까? 제주도를 지배했던 레드 콤플렉스의 그림자는 과연 벗겨졌을까? 우리 주위에 ‘보안관찰’ 대상자로 묶어두고 있는 억울한 사람은 없을까? 도민을 이데올로기의 도가니에 몰아넣었던 4·3도 정부 차원의 진상위원회가 조직되었으며, 특별법도 만들어졌고, 무고한 희생자들의 명예가 회복되면서 아픈 상처를 하나씩 치유해 가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레드 콤플렉스의 그림자는 주의를 서성거리고 있다. 그렇다면 레드 콤플렉스는 언제 한반도에 뿌리를 내렸을까? 혹자는 그것이 일제 시대에 발화했다고 말한다. 혹자는 해방되어 분단과 신탁통치 논쟁 속에서 좌익들이 찬탁하는 통에 생겼다고도 말한다. 그러나 한국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반공이데올로기는 있었더라도 민중들에게 전횡될 수 없었고, 지배이데올로기로서 절대적 지위를 누릴 수는 없었다. 반공이데올로기가 지배이데올로기로서 내면화한 것은 한국전쟁이 계기가 되었다. 레드 콤플렉스는 이 땅의 수만의 사람들을 죽이고 생매장하고 내쫓고 바꾸기를 강요했다. 그것은 인류가 몇 백년이 걸려 만들고 지켜온 사상의 자유, 학문의 자유를 ‘빨갱이’라는 이름 하에 헌신짝처럼 버리도록 만들었다. 지난 냉전의 시대에는 서구에서조차 학문의 자유가 억압당했고 학문이 객관성을 잃었다. 평화라는 말조차도 냉전에 덫에 걸려 사형장에서 처참하게 목을 베이는 아픔을 당하였다. 과거 4·3으로 도민 가운데 3만여 명이 사망했으며, 학살 현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일본으로 밀항 길에 올랐고, 이들 중 상당수가 조총련에 흡수되었다. 문제는 고향에 남은 사람들이었다. 떠난 자들과 혈연이든 인연이든 ‘어떤’ 연관을 맺고 있던 상당수의 사람들이 군사정권 시기에 간첩으로 몰려 말못할 희생을 당했다. 당시 희생자들에게 강요됐던 연좌제적 처형과 침묵, 그리고 복종이 이후 조작간첩 피해자들에게 계속 작동하였다. 시대가 변했다고 하지만 조작간첩사건의 진상은 규명되지 못했다. 그런데 최근 천주교인권위원회가 제주도의 대표적인 ‘조작간첩’ 희생자인 이장형씨와 강희철씨에 대한 ‘재심’을 청구하여 그들의 명예회복 여부에 관심을 끌고 있다. 이장형, 그는 누구인가? 그는 1984년 6월 간첩행위를 한 혐의로 체포되어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5년을 감옥에서 살다가 98년 8월15일 가석방되었다. 1984년 6월15일 제주항에 도착하자마자 임의동행 형식으로 연행돼 8월10일 정식 구속영장이 발부될 때까지 57일 동안 영장 없이 구금되었다. 연행된 날로부터 7일동안 잠을 자지 못한 채 폭행을 당했을 뿐만 아니라, 물 고문과 전기고문을 당하기도 하였다. 강희철 역시 1986년 12월4일 국가보안법 위반 등으로 제주지법으로부터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13년간 복역하다 1998년 8·15특사로 가석방돼 8년간 보호감찰을 받고 있다. 그 역시 85일간 불법 구금됐고, 6일 동안 음식물 섭취를 못한 것은 물론 구타와 물 고문 등을 받았다. 이장형씨 강희철씨 사건은 대표적인 조작간첩 사건이라는 것이 대체적인 중론이다. 조작되고 억압된 역사의 피해자인 이들에게 사법부가 스스로 진실을 밝혀야 할 때이다. 이들의 억울함과 명예가 하루빨리 회복되는 길은 양심 있는 온 국민이 바램일지도 모른다. 레드 콤플렉스는 빨갱이에 대한 공포감이 아니다. 오히려 빨갱이를 잡는 극성스런 반공 투사들에 대한 공포에 가깝다.

김   관    후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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