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중학교 때 읽었던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읽었다. 처참한 곤궁과 정신적 압박 속에서 쓰여 졌다는 <죄와 벌>에는 참된 자성과 참회가 무엇인지 잘 나타나고 있다.

무고한 전당포 노파를 살해한다. 라스콜리니코프는 ‘나는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다. 이데올로기를 죽인 것이다’라고 자조어린 독백을 한다. 그러나 초인주의의 우월감에 사로잡힌 주인공은 소냐라는 순백한 영혼 앞에 무릎을 꿇고 만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살인에 의하여 부와 권력을 장악하려 했지만, 그것은 새로운 예루살렘, 지상의 이상향을 건설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범행 직후에 라스콜리니코프 자신은 이제 완전히 고독하다고 느낀다. 완전한 고독 속에서는 인간은 살지 못한다. 절대 고독. 이것이 그를 괴롭힌다. 촛불이 희미하게 반짝이는 어두컴컴한 방에서 “나자로의 부활”을 읽고 있는 창녀와 그것을 듣고 있는 살인자, 이것이 이작품의 상징적인 장면일 것이다. “당신은 곧 네거리로 나가셔서 땅에 엎드려 입을 맞추세요. 그리고 절을 하고 나서 ‘나는 사람을 죽였소’ 하고 큰 소리로 외치세요. 그러면 하느님께서 반드시 당신을 구원하여 주실 거예요” ‘운명의 마수에 몹쓸 학대를 받으면서도 소냐는 조금도 인간을 원망치 않고 굳게 믿고 있는 것이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소냐와 작별하고 돌아오면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하는 고백이라는 것이 얼마나 영혼에 위안이 되는 것인가를 비로소 깨닫게 된다.

소냐의 경건한 정신의 힘이 마침내 그를 정복한 것이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소냐 앞에 무릎을 꿇고, 그 발에 키스를 한다. 그리고 이 키스는 너에게 한 것이 아니고, 인류의 고뇌에 대한 키스라고 말한다. 소냐는 사랑과 자기희생에 의하여 라스콜리니코프를 구원하고, 자기의 신앙세계로 그를 인도하려고 한다. 그리하여 그는 드디어 소냐의 사랑 앞에 무릎을 꿇고, 참회의 눈물로 자수를 한다.

사람들에게는 가슴속으로 흐르는 참회의 눈물이 있기에 삶의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대목이다. 여기에서 일부 지성입네 하는 일부 사람들이 곡예를 하듯 권력주변만을 맴돌며, 선거 때면 자신들의 정치관과는 상관없이 지지율이 높은 후보자 켐프에서 계산된 투기를 하며 항상 권력에 맞춰 변신하고, 그래서 자신이 누린 부와 명예가 몇 백 년이라도 유지 될 것처럼 뽐내며 사회를 호령하던 사람들이 과연 인생의 말로를 보면 알 수 있다.

이 와같이 조작된 사회의 지도자는 죄와벌 에서의 주인공처럼 가슴속으로 흐르는 눈물로 참회한다면 밝은 사회가 되고, 자신들도 무척이나 행복한 인생이 될 수 있을 것만 같다. 칼히터의 <행복론>에서의 말을 빌리면 행복이라는 궁극적 의미는 ‘향락’이 아니고 극복이라고 했다. 즉 악과 연약함에 대한 극복, 마음 안에 있는 부끄러운 생각, 연약함, 불안감, 절망, 좌절, 갈등, 유혹 등에 대한 끓임 없는 극복이 진정한 의미의 행복감이라는 것이다. 향락을 끓고 극복으로 생활 한다는 것 자체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여기에 키워드는 욕심을 버리라는 것이다. 인도네시아의 세레베스의 섬사람들은 생계수단으로 원숭이를 사로잡아 관광객들에게 판다. 그런데 그들의 원숭이를 잡는 방법이 독특하다. 잡는 도구는 원숭이가 손을 집어넣을 구멍을 좁게 하고 쌀을 놓을 곳을 크게 한 박을 만들고 거기에 쌀을 놓아두면 쌀을 좋아하는 원숭이들이 쌀 냄새를 맡고는 박속으로 손을 넣어 쌀을 한줌 움켜쥔다.

그러고 나서 손을 꺼내려고 하지만 움켜쥔 살을 포기 하지 않은 한 손은 빠지지 않는다. 원숭이가 안간힘을 쓰는 동안 사람들은 원숭이를 붙잡는다. 웃기는 건 원숭이는 인간에게 잡혀왔어도 여전히 손에 쌀을 움켜쥐고 있다는 사실이다. 참회눈물의 상처, 이것은 밝은 사회를 만드는 디딤돌이 되어 자갈밭같이 메마른 내 가슴을 촉촉이 적저 줄 것만 같다 .

김   찬   집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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