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에는 신성성ㆍ신이성이 있다

제주도의 신화, 전설 및 민속은 제주민의 생활과 결부된 각종 의례, 세시풍속, 신앙, 언어문화 등 생활풍습을 기반으로 한 전통적인 문화를 말한다. 제주마는 탐라개벽신화에서부터 등장한 이래 오랜 세월동안 우리와 삶을 함께 해 왔다. 예부터 무속인만이 병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상징적으로는 마신(馬神)도 병을 고치는 주술적 신앙을 믿어 서낭당(堂)의 신체(神體)를 말(馬)로 하여 쉽게 멸하지 않는 영속성을 발휘하는 신성성(神聖性), 일상적인 것과 구별되는 출사(出師)나 사냥시 마신에게 제사를 지냈으며 북두칠성(北斗七星) 같은 별에 비유함은 인간생활에 끼친 공헌과 말이 지닌 신이성(神異性)이 강조로 신체(神體)의 대상되었다.

벽제의 멸망 때는 미리 백마가 오함사(寺)의 죽음과 온조왕이 승하하기 전 무릎을 끊고 슬피 움과 신라의 건국신화와 백마전설인 영험성(靈驗性) 등이 있다. 또한 빠르게 변화하는 지식정보사회에서 힘과 권위의 상징인 속도와 활력의 이미지로 승용차 이름인 Pony, Equus, Gallopper 등 운송업체의 심벌마크, 건각(健脚)인 야성적인 말 이미지가 이용되고 있으며 적극적이고 자신감 넘치게 力動的으로 도약하는 말 그림들이 우리들 주변에서 많이 볼 수 있다.

1. 삼성신화와 천마

제주도 개벽 삼성시조 신화에 관한 문헌으로 가장 오랜 역사자료인 영주지(瀛州誌)의 기록을 인용하면 『瀛州太初 無人物也 忽有三神人 望見紫泥封木函..... 自東海中浮來......... 自此以作始業産業 植播五穀 且牧駒犢 日就富庶.......』이라 기록되어있다. 원문을 요약하면 태초에 제주도에는 사람이 없더니 하루는 홀연 삼신인(三神人:고을나, 양을나, 부을나)이 한라산 북쪽 기슭 광양 모흥혈에서 용출하였다.

삼신인은 들판을 누비며 사냥하여 가죽옷을 입고 고기를 주식으로 생활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하루는 동해변에 자주색으로 된 봉함한 석함(石函:木函)이 떠내려 오므로 내려가 각을 열어보니 놀랍게도 함 안에는 청색옷을 입은 3 공주와 함께 나온 사자(使者)는 고개 숙여 절하며 ‘저는 백랑국의 사자입니다.

저희 임금님께서는 세 딸을 두셨는데 시집갈 나이가 되어 하루는 자소각에 올라 서쪽바다를 바라보니 보랏빛 기운이 하늘로 이어지고 찬란한 서광(曙光)이 한라산 높은 봉우리에 서려 있었습니다. 그곳에 삼신인이 솟아나 나라를 세우려 하지만 배필이 없는 지라 저에게 세 공주를 모시고 가라고 명(命)하여 여기에 왔습니다. 마땅히 혼례를 치루시고 나라를 세우시고 대업을 이루소서’ 말을 마친 사자는 백마(白馬)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

그리고 이 석함에는 망아지(駒), 송아지(犢) 및 오곡종자가 들어 있었다. 삼공주가 들어 있던 석함이 발견된 곳은 삼신인이 귀중한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해 쾌성을 질렀다고 하여 속칭 ‘쾌성개(연혼지비석이 있음)’라고 불리는 곳으로 이 석함이 도착한 해안을 ‘황루알’이라 부른다.

지금도 여기에서는 사신의 백마와 삼공주가 바닷가에서 혼인지로 갈 때 탔던 말 발자국이 암반에 선명히 나타나 있어서 이 전설을 더욱더 신비롭게 뒷받침해준다. 이 말 발자국을 보려면 성산읍 온평리 마을에서 해안도로를 따라 바닷가로 향하면 볼 수 있는데 썰물 때를 맞추어서 가야 좀 더 선명하게 볼 수 있다.

삼신인은 여기에서 1.5Km 북쪽에 있는 혼인지(큰 못)에서 목욕을 하고 혼례를 올린 뒤 ‘흰죽’이라는 굴에서 살다가 물 좋고 토질이 비옥한 곳을 구하기 위해 ‘사시장올악’에서 활을 쏘아 고을나가 좌정처로 정한 곳을 일도, 양을나가 정한 곳을 이도, 부을나가 정한 곳을 삼도라 하였고 이때 화살이 박혔던 돌을 삼사석(三射石:지방기념물 34호, 제주시 화북동 1380번지)라 하였다. 그로부터 그곳에 정착하여 오곡을 파종하고 말과 소를 길러 날로 번창하였다. 그 후 900년이 지난 뒤에 고씨를 왕으로 삼고 나라이름을 탐라국(耽羅國)이라 하였다.

2. 단맥설화

단맥설화는 중국을 제패한 진시황은 풍수쟁이 호종달(胡宗旦)을 제주도로 보내 산재해 있는 장군혈을 끓어서 우환거리를 없애려는 심산이었다. 칙명을 받고 제주도에 온 호종달(胡宗旦)은 곳곳에서 혈을 떠 가다가 어느 곳에선가 또 하나의 혈을 발견하고 쇠막대를 찌른 후 주변의 농부에게 그 막대를 빼지 말라고 당부했으나 호종달(胡宗旦)이 떠난 후 한 백발노인이 나타나 농부에게 쇠막대를 빼달라고 애원하자 농부는 노인의 고통스러운 표정을 보다 못해 쇠막대를 빼버렸다.

그러자 그 자리에서 피가 솟아올랐고, 노인은 구멍을 막아 피를 멎게 한 후 사라졌는데 이 혈이 마혈(馬穴)이었다고 한다. 다행히 솟아오르는 피가 멎었으므로 제주도 말의 명맥은 이어졌으나 어느 정도 피가 솟아 제주도의 말은 그 몸집이 작아지게 된 것이라고 전하여 진다.

그리고 호종달이가 제주도에서 큰 인물이 태어날 것을 우려해 지맥을 끊고 달아나다 한라산 수호신이 매로 변하여 고산 앞바다에 배를 가라앉혀 중국으로 돌아가는 막았다 것으로 이곳을 차귀(遮歸)라고 한다. (일부 지역에서는 왕이 태어날 것을 우려해 보내졌다고도 전해진다). 또한 이 마혈(馬血)이야기는 제주도가 예로부터 목마산지임과 목마장이 생기고 말을 목축하게 된 내력을 설명하며 아울러 호종달이 내륙에서 온 정탐자로서 목마장(牧馬場)으로서의 입지적 조건이 좋은 곳인 한라산의 목마장으로서의 최적지임을 인식하고 그 비밀을 자기에게 협조하는 경주 김씨(慶州 金氏)에게 알려주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경주 김씨는 말을 길러 큰 부자가 되었으며 목축을 가업으로 계승하였고 그 결과 조선시대에는 나라에 말을 진상한 공로로 감목관이 되었고 그 벼슬을 세습하게 되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3. 감목관 김댁

제주의 경주 김씨(慶州金氏)는 역대 감목관(監牧官)을 지낸 것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흔히 감목관 김댁이라 부른다. 이 집안이 처음 감목관을 받은 것은 조선시대 선조 때부터요, 그 후 대대로 감목관을 세습했을 뿐 아니라 그 외의 많은 벼슬을 하고 재산이 많아서 기세가 등등하였다.

이 집안이 이렇게 번창한 것은 선조의 묘를 잘 썼기 때문이라 전한다. 그 묘는 남원읍 의귀(衣貴) 남쪽, 민오름 앞 반데기라는 곳에 있다. 이 묘는 당시 제주목사가 보아 주었다고 하는데, 그 이야기는 이러하다. 당시 이 김씨는 의귀에 살고 있었는데, 그때도 벼슬을 간간히 하여 집안의 명망이 있었다.

그래서 목사가 순력(巡歷)할 때는 이 김댁에 자주 들리곤 하였다. 이때 마침 집안에 상사가 나니, 지리에 능한 목사가 묏자리를 봐 주게 된 것이다. 목사는 김댁의 상제와 더불어 묏자리를 보러 나섰다. 며칠간 여기저기 들판을 돌아다니다가 이 민오름 앞 반데기에서 대혈(大穴)을 발견하였다.

목사는 지리도식(地理圖式)을 펴 놓고 그 곳 지형과 맞추어 보고는 칠대혈 중의 하나가 틀림없다고 했다. 그 7대혈(七大穴)이란 1 사라, 2 어스승, 3 영실, 4 반화, 5 구셍이, 6 반데기, 7 한운이라 하기도 하고, 1 사라, 2 개미목, 3 영실, 4 반데기, 5 반화, 6 구셍이, 7 한운이라 하기도 한다. 목사는 도식(圖式)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다가 정혈(正穴)을 집어내었다.

그러고는 상제를 데려다 그 자리에 세우고, ‘내 저 위쪽으로 가서 돌아보고 올 터이니, 여기 발에 힘을 꽉 주고 서서, 어떤 일이 있어도 결코 발을 들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상제는 발에 힘을 주어 땅을 디디고 섰다. 이상한 일이었다. 목사가 저만큼 위쪽으로 가서 차차 가까이 걸어와 가니 발바닥이 간질간질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상제는 간지러움을 꾹 참고 더욱 발에 힘을 주었다.

목사가 점점 가까이 올수록 발바닥의 간지러움은 더해 갔다. 마지막에는 간지럽다 못해 발이 달달 떨려, 아무리 발에 힘을 주어 봐도 견딜 수가 없어 그만 발을 들고 말았다. 그 순간이었다. 발을 디디고 섰던 그 자리 땅속에서 쌍 비둘기가 한 쌍 푸르릉 날아가는 것이었다. 목사가 위쪽으로 올라가서 밟아 내려온 것은 용의 맥을 몰아 내려오는 것이었다.

위로부터 용맥을 몰아다가 광(壙)을 팔 정자리에 응결시켜 놓고 그 자리에 매장토록 하려 한 것이니, 용맥이 응결되면 될수록 그 용맥의 요동으로 발밑이 간지러워진 것이다. 마지막 견디지 못해 발을 들자 날아간 비둘기는 바로 그 맥이 비둘기로 응결되어 날아간 버린 것이다. 목사는 한편 꾸짖고 한편 탄식했다. “그까짓 것을 견디지 못해서 발을 떼다니! 아깝다. 그러나 1백년 후엔 맥이 다시 원자리로 돌아올 것이다, 발복이 조금 늦겠지마는 그대로 묘를 쓰시오.” 목사 말대로 그 자리에 장사를 지냈다.

그 후 1백년 가까이 세월이 흘러 현손(玄孫)이 장가를 들었다. 처가는 말을 수백필치는 부잣집이었다. 처가에서는 집이나 밭은 물려주지 않고 겨우 웅마(雄馬) 한 마리를 물려주었다. 이 말을 받아다가 목자에 놓아먹이는데, 하루는 이 말이 사라져 버렸다. 이튿날은 말을 찾으러 가야겠다하고 차롱(도시락)에 밥을 싸 들고 목장에 가 보았더니, 의외에도 이 수말이 1백여 마리의 암말을 거느리고 그 자리에 와 있었다. 살펴보니 그 말들은 전부 처가의 것이었다.

사위는 곧 처가에 연락하여 이 말떼를 다 몰아가게 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자 이 수말이 나가서 다시 그 말떼를 모조리 거느리고 왔다. 몰아가면 끌어오고, 몰아가면 끌어오고, 수십 번 해가니 처가에서도 이젠 어쩔 수가 없었다. 할 수없는 일이니 그 말떼를 전부 가져버리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김씨댁은 일약 말 부자가 되었다. 이 말들이 새끼를 낳고 또 새끼를 낳고하여 수년 내에 말은 수백 필이 되었다. 말이 크게 불어나자, 김씨는 말 5백 필을 나라에 바쳤다.

나라에서는 곧 헌마공신(獻馬功臣)이라 하여 감목관(監牧官) 벼슬을 내린 것이다. 그 후, 감목관 김씨는 감매장·녹산장 등 목장에서 목자(牧者)들을 시켜 국마(國馬)를 잘 관리했을 뿐만 아니라 해마다 꼭꼭 말을 잘 올려 감목관을 세습(世襲)하게 되었던 것이다. 감목관 김댁은 집을 지을 때 살아있는 쿳나무 생깃기둥으로 이용하여 지었다고 한다.

즉 땅에 심어져서 살아있는 쿳나무를 그대로 생깃기둥으로 이용하여 집을 지었다는 말이다. 생깃기둥이란 큰 구들(큰 방)과 상방(上房·마루방)의 샛기둥으로서 집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기둥이다. 이 기둥 밑이 주인이 앉는 상좌(上座)이고 이 기둥에 중요한 물건을 걸어 놓고 한다. 감목관 김씨 집안이 쿳나무를 산채로 기둥을 삼은 것은, 해마다 새로운 가시가 돋아나므로 대대로 받아오는 인통(印?)을 그 새로운 가시에 걸어 놓기 위해서였다. 과연 대대로 감목관을 하니 인통이 점점 불어나고, 인통이 불어날 때마다 그 인통을 걸어놓을 가시가 생깃기둥에 새로이 돋아났다고 한다. <남제주의 전통과 얼, 서문당 제주도전설>

장   덕   지 교수

제주산업정보대학 애완동물관리과(제주마문화연구소장ㆍ제주도문화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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