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남방정책 일번지 인도네시아를 가다③
정낭·고인돌·돌하르방 등 제주문화도 동남아서 발견돼
하멜표류 여정 근거 자카르타-제주간 뱃길 두 달 걸려

해양박물관 전망대에서 바라본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유적인 해양박물관(Museum Bahari)과 순다 끌라파항 모습.
해양박물관 전망대에서 바라본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유적인 해양박물관(Museum Bahari)과 순다 끌라파항 모습.

제주와 인도네시아간 교류의 역사를 추적해 보자.

고온 다습한 열대지방의 특성상 인도네시아내에는 문헌기록으로 남아있는 것은 거의 없다. 제주의 입장에서도 탐라국시대부터 성주청(星主廳)이 자리잡았던 관덕정이 여러차례 화재로 소실되면서 역사 기록은 찾을 수가 없다.

그러나 인도네시아와 제주간 인적 교류의 흔적은 우리가 잘 아는 하멜을 통해서 찾을수 있다. 하멜은 1653년 6월14일 동인도회사 소속 스페르웨르(Sperwer)호에 탑승, 자카르타(바타비아)의 순다 끌라빠(Sunda Kelaba)항을 출발했다. 대만을 경유해 일본 나가사키로 가던 하멜 등 64명의 선원은 태풍을 만나 닷새간의 표류 끝에 36명이 살아남아 같은해 8월15일 제주로 표류하게 됐다. 동력선이 아닌 범선으로 자카르타에서 제주까지 딱 두 달이 걸렸다.

하멜보다 26년 먼저 조선에 온 박연(얀 벨테브레)도 동인도회사 소속 사략선(私掠船, 해적선) 항해사였고, 역시 바타비아를 근거지로 활동하다 1627년 제주 해안에 식수를 구하러 부하 2명과 함께 상륙했다가 조선에 남게 됐다고 알려진다.

이보다 훨씬 거슬러 올라가면 6세기 중반에는 백제국의 겸익(謙益)스님이 바닷길 실크로드를 따라 백제에서 중국의 광저우(廣州)항으로 갔고, 여기서 부남(扶南, 캄보디아)국-말라카해협을 거쳐 인도로 구법활동을 떠났다. 이길은 200년 후 통일신라의 혜초스님이 왕오천축국으로 향했던 구법의 길과도 같은 항로였다.

이 바닷길 실크로드는 인도를 출발해 스리랑카를 거쳐 인도네시아의 팔렘방-순다열도-캄보디아-광저우-한반도의 남해안까지 이어진다. 이 항로는 당시 한반도와 중국, 일본과의 해상교류을 통해 부를 축적해야만 했던 탐라국도 참여했을 것이다.

기원 전후부터 인도의 불교와 힌두문명이 본격적으로 동남아로 유입되면서 인도화(Indianization)가 진행돼 동남아 전역에 인도화된 왕국들이 출현했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순다 끌라빠항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망대.
순다 끌라빠항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망대.

특히 인도네시아의 경우 팔렘방을 근거지로 한 스리비자야(Sriwijaya 659-1377)왕국과 샤일렌드라(Shailendra, 8~9세기)왕국이 중계무역을 통해 강력한 해양제국으로 번성하면서 주변국과의 교류를 확대했다.

세계에서 가장 큰 불교사원의 하나로 손꼽히는 인도네시아 자와섬의 보로부드르(Borobudur, 언덕위에 세워진 사원이라는 뜻)는 소승불교가 아니라 한국, 중국과 같은 대승불교 유적이다. 제주의 문화로 일컬어졌던 ‘당오백 절오백’도 인도에서 동남아를 거쳐 제주로 들어온 불교와 힌두문화의 영향으로 추정된다.

중국 동진(東晋)의 승려 법현(法顯, 337?~422?)의 불국기(佛國記)와 당나라 때 승려 의정(義淨, 635-713님의 ‘남해기귀내법전’(南海奇歸內法傳)을 통해 당시의 바닷길 실크로드를 통한 활발한 교류현황을 알 수 있다.

특히 법현스님은 인도에서의 구법생활을 마치고 남해항로를 따라 귀국길에 나서 중국의 산둥(山東)성 칭다오(靑島)로 돌아왔다고 전해지는 만큼 이미 4세기에 바닷길 실크로드가 열렸으며, 당시 이미 중국과 활발히 교류활동을 하던 탐라국도 자연스럽게 동남아와 교류하지 않았을까 유추해 볼 수 있다.

실제로 신화의 섬으로 널리 알려진 제주의 많은 신화 내용이 인도의 그것과 유사하고, 특히 뱀신화와 뱀신앙은 인도를 출발해 인도네시아, 캄보디아, 중국의 남해안을 거쳐 제주도까지 온 것으로 추정된다.

제주만의 독특한 문화로 알려진 ‘정낭’도 남인도는 물론 인도네시아와 캄보디아 등 인도차이나반도에도 있으며, 집주인의 외출여부를 알려주는 신호체계도 기본적으로 같다고 한다.

이와함께 제주의 고인돌과 줄다리기, 돌하르방 등도 이 바닷길 실크로드를 통한 인적·물적 교류과정에서 발전한 것이라는 연구결과도 속속 나오고 있다.

제주가 신남방정책을 추진하는 것은 어쩌면 필연이다. 서양이 대항해시대를 본격화하면서 자카르타-타이완-일본 나가사끼를 연결하는 무역이 활발했던 당시 1629년(인조 7년) 조선은 제주에 대해 출륙금지령을 내렸다. 섬사람들이 육지로 나가는 것을 아에 금지했고, 도민을 옥죄던 출륙금지령은 이후 200년동안 지속되면서 제주인의 해양 개척 DNA를 가둬버렸다.

이제 민선8기 들어 신남방정책을 통해 수천년간 제주인의 DNA에 흐르다가 200년간 잊혀졌던 해양개척이 다시금 이뤄지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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