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80년대 현대건설 CEO '산업화의 주역'
서울시장 경력 발판 한나라당 대선후보 선출

▲탄생과 유년시절

이명박은 1941년 12월 19일 일본 오사카에서 가난한 목장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적은 경북 포항시 북구 흥해읍 의창면 덕성동 537번지. 이지만 부친이 일제 강점기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일자리를 찾아 일본으로 넘어가는 바람에 출생지가 일본이 됐다. 이 전 시장의 부친은 일본에서 목장 노동자로 일하다가 건축과 관련된 일을 하면서 기반을 잡았지만 귀국길에 배가 침몰하는 바람에 모든 것을 잃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포항 영흥초등학교와 포항중학교를 거쳐 동지상고 야간부를 졸업하는데 당시 집안 형편이 너무 어려워 학업을 중도에 포기해야 할 상황이었지만 중학교 담임 선생님의 거듭된 권고로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동지상고에 입학하게 된다.

▲상경과 대학시절

어렵사리 고등학교를 마친 이명박은 고등학교 졸업식을 앞둔 1959년 12월 동생과 함께 진학이나 생활에 대한 대책없이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싣는다. 낮에는 날품팔이 밤에는 입시준비로 주경야독을 하며 공부한 끝에 1961년 고려대 상과대학에 합격하지만 합격한 후 학비 때문에 오히려 걱정이 앞섰다. 이 전 시장의 어머니는 막내 아들의 대학합격을 축하하기는 커녕 “니가 어쩌려고 그런 일을 저질렀느냐”고 책망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태원 시장 상인들이 시장 쓰레기를 치우는 환경미화원 아르바이트 자리를 마련해 줘 이른 새벽 시장으로 나가 수레에 쓰레기를 가득 싣고 한강변까지 내다 버리는 고학으로 대학생활을 시작했다. 친구도 돈도 없던 대학 시절 고려대 상과대 학생회장에 혈혈단신으로 출마한 것도 이런 그의 생각과 무관치 않은 것으로 알려졌는데 선거에서 학생회장에 당선돼 한일 국교정상화에 반대하는 6.3 시위를 주도하다 6개월의 옥고도 치렀다.

▲현대건설 입사∼CEO까지

대학을 졸업한 이명박은 한 동안 취직이 안돼 고생했다. 6.3 사태 때 시위를 주도하다 투옥된 전력이 꼬리표로 따라 다녔기 때문이다. 원서를 내는 곳마다 신원조회 과정에서 떨어지기 일쑤였는데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게 편지까지 보내는 우여곡절 끝에 1965년 현대건설에 입사하게 된다. 입사 당시 조그만 중소기업에 불과했던 현대건설에서 그의 성장과 성취는 실로 놀랍다. 입사 5년만에 이사로 승진하고 12년만인 1977년 만 35세의 나이에 현대건설 사장 자리에 오르고 이후 인천제철과 현대산업개발대한알미늄, 현대엔지니어링, 한라건설 사장을 거쳤고 1988년 현대건설 회장에 오른 것을 시작으로 현대백화점 등 5개 현대계열사의 회장을 역임했다.

▲정치 입문 이후

이명박 전 시장은 14대 총선에서 민자당 전국구 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한다. 비교적 순탄하게 정치인생을 시작한 것 같지만 95년 전면적인 지방자치 선거에서 여권 핵심부의 서울시장 경선반대로 서울시장에 도전하려던 시도가 좌절됐고 종로선거 이후 선거법 위반으로 기소될 처지에 놓이자 의원직을 사퇴하는 굴곡도 겪었다. 국민의 정부 시절 2번째 서울시장 선거에 도전했을 때는 당내 경선에서 정원식 전 총리에게 패배했고 99년에는 미국 조지워싱턴대학교의 객원연구원으로 정치적 낭인생활을 하기도 했다. 이 전 시장은 재임중 수많은 반대를 무릎쓰고 청계천 복원사업을 강행해 선풍적인 인기몰이를 했고 지하철과 버스 환승체계 수립, 중앙차로제 도입 등으로 요약되는 서울 대중교통 개혁을 밀어부쳐 시민들로부터 호응을 얻었다. 이 전 시장은 이같은 정치적 자산을 바탕으로 라이벌인 박근혜 전 대표를 누르고 한나라당 대선후보로 선출돼 대권을 향한 대장정의 막을 올리게 됐다. 민자당 전국구 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한 후 4년 뒤에는 정치 1번지 종로구 국회의원으로 또 민선 서울시장으로서 정치적 외형을 확대해 가면서 대통령의 꿈을 구체화시켜 나간다. 시장 재직 시절 엄청난 반대를 뚫고 청계천을 복원하고 역대 어느 시장도 성사시키지 못했던 대중교통의 혁명을 이뤄내면서 이 전 시장은 정치인으로서의 가능성을 주목받기 시작했다.  [노컷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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