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둡고 칙칙한 불확실성

 늦가을 비가 추적거렸다. 목에 감기는 바람은 차고 축축했다. 을씨년스런 날씨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꼴도 그렇다.

 위기라고 한다. 못살겠다고 아우성이다. 희망의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모두가 어둡고 칙칙한 절망적 상황이다. 그래서 더욱 불안하다.

 경제 위기가 부른 조바심이다. 1929년 대공황이후 최악의 글로벌 경제 위기라 한다. 우리로서도 10년 전 악몽의 ‘환란 폭탄’보다 더 큰 위기와 맞닥뜨린 셈이다.

 눈앞에 드리워진 것은 ‘불확실성의 커튼’이다. 그러니 무대를 예측할 수 없다.

 엄살이 아니다. 거리에서든 어디서든 스치는 사람들의 표정은 어둡고 무겁다. 내남 없는 불안의 군상(群像)이다.

 이처럼 무겁게 가라앉은 우울한 가을 날, 두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법정스님과 산악인 엄홍길씨였다. 대면(對面)은 아니었다. 활자를 통해서였다.

 법정 스님은 최근 내놓은 산문집 ‘아름다운 마무리’에서, 엄홍길씨는 그제(24일)자 신문 인터뷰 기사에서였다.

 두 분의 글과 인터뷰 기사에서 힘들고 어두운 시대상황을 헤쳐나 갈 수 있는 빤짝 지혜를 엮어낼 수 있었다. 나름의 생각으로는 그렇다.

비우고 최선 다하는 삶 

 법정 스님은 “영원한 것은 없다”고 했다. 모두가 한 때일 뿐, 그 한 때에 최선을 다해 살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삶은 놀라운 신비요 아름다움‘이기 때문에 삶의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해서는 “채움만을 위해 달려온 생각을 버리고 비움에 다가서야 한다”고도 했다. 비움이 가져다주는 충만으로 자신을 채우라는 것이다.

 선승(禪僧)의 경지를 기웃거려 외람스럽지만 “어려울 때 일수록 욕심을 버리고 죽을 때 까지 최선을 다하라”는 가르침으로 받아들여졌다.

 엄홍길씨도 같은 맥락의 메시지였다. “힘들다고 돌투성이 길에서 주저앉으면 꽃길은 볼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목숨을 걸고 최선을 다해 본적이 있는가” 반문한 그는 “죽을 각오로 최선을 다했다면 실패했어도 실패가 아니”라고 했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숱하게 넘긴 산사나이의 경험 철학은 “아무리 어려워도 주저앉지 말라”는 독려였다.
 ‘최선을 다하는 삶,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끈질긴 도전‘, 절망적 환란의 시대에 모두가 한번쯤 되새겨 볼 말이다.

부끄럽고 한심하고 옹졸

 그렇다고 이것만으로 역경을 일거에 무너뜨릴 수는 없는 일이다.

 위기에 대응하려는 저변의 역량을 어떻게 결집시키고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 가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수 있기 때문이다. 국가 경영 리더십의 문제다.

 그런데 여기서 혼란을 느낀다. 좌절을 맛볼 수밖에 없다. 기대했던 나라의 리더십이 실망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어서다.

 손을 내밀고, 서로 껴안고, 어께 걸어 함께 발맞추어 가는 통합과 포용의 리더십은 보이지 않는다. 내치고 편 가르고 서로 눈 흘기는 분열과 미움의 악다구니만 있을 뿐이다.

 비움의 아름다움은 보이지 않고 너도 나도 챙기고 채우기에 허겁지겁하고 있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 당선자는 치열하게 싸웠던 당내 대통령후보 경쟁자 힐러리를 껴안았다. 대통령 선거에서 싸웠던 상대당 후보 메케인의 손도 잡았다.

 오바마의 통합과 포용의 리더십이 부럽고 그 앞에서 더욱 부끄러워지는 이유는 비교되는 우리의 리더십이 더욱 옹졸하고 한심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내편 네 편 가를 때가 아니다. 서로가 손을 내밀고 손을 잡아야 할 때다. 그래서 함께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는 일이다.

 이제는 정말 통합과 포용의 리더십을 발휘할 때다. 이것이 리더십 위기를 맞는 이명박 대통령이 던져야 할 마지막 카드다. 모든 위기의 해법은 여기서 찾아야 한다. 

김  덕  남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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