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인의 윤곽조차 알지 못하는 엽기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수사본부가 설치되고 현장이 봉쇄된다. 시민들은 수사본부의 발표에 의해서만 사건의 내막을 알 수 있다. 수사본부가 “범인이 타고 달아난 차량이 청색 화물차로 밝혀졌다”는 보도가 나간다.

 이윽고 범인이 타고 다녔을 것이라는 청색 화물차에 대한 신고가 끊임없이 들어온다. 그러나 수사결과는 청색 화물차가 아니라, 베이지색 승용차였다.

▶인간의 기억은 복잡한 메커니즘을 띤다. 어떤 것은 잘 기억하는데 어떤 것은 거의 기억을 할 수가 없다. 흔히 인용되는 에빙하우스의 망각곡선이 있다.

시간에 따른 망각의 정도를 표시한 것인데, 이틀 동안에 66%, 1개월이 지나면 79%를 망각해 버리고 나머지 21%는 오랫동안 기억할 수 있다는 이론이다. 학습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66%를 잊어버리는 이틀 안에 기억한 것을 반복학습 하면 효과적이라는 얘기가 된다.

▶ 청색 승용차를 베이지색 화물차로 오인한 것은 망각기억과는 다른 ‘허위기억’과 연관된다. ‘학습’ 한 것을 망각하는 정도가 아닌 엉뚱한 것을 오인 기억하는 형태이다.

이것은 강력한 암시에 의해서 이뤄지는 기억이다. 엽기적 살인사건의 수사결과 발표는 시민들에게 그 발표를 거의 진실로 믿게끔 하는 강력한 암시의 힘이 있다.

시민들은 수사결과 발표에 따라 범인이 타고 간 차량이 청색 화물차라는 강력한 암시를 받음으로써 청색 화물차를 범인이 타고 한 차량으로 착각한 것이다.

▶강력한 암시의 힘에 의한 허위기억의 주입은 특히 영상매체가 큰 영향력을 갖는다. 요즘 논란이 되고 있는 ‘대통령 탄핵방송 편파 시비’도 기억을 연구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허위기억 주입 논란’이다.

탄핵 찬성에 대한 사진보다, 반대에 대한 사진만을 집중 반영한 것은 시청자로 하여금 국민 거의 모두 반대하는 것으로 암시를 주입할 수 있다. 허위기억의 주입은 영상매체의 전유물이 아니다. 지도자가 “경제가 어렵다”고 하면 국민들도 “경제가 어렵다”고 암시를 받고 기억에 주입하게 되고 늘 기억하면서 대비를 하게 된다.

지도자가 “경제가 어렵지 않다”고 해도 같은 과정을 거친다. 지도자의 이런 기억주입은 그러나 국민들의 공감을 얻을 때만이 가능하다. 암시에 의한 허위기억 주입은 피암시자가 이미사실로 확정하고 있는 것을 “사실이 아니다”고 하면 대뇌의 ‘기억 프로세스’가 진행되지 않는다. 이것은 기억 이전에 사실의 확인, 오인이라는 과정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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