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완병의 생태칼럼]

남녘에서 올라온 제비들과 제주도롱뇽 산란으로 봄소식을 전하는데, 먼 한라산은 하얀 세상이다. 지인이 제보해준 하얀 흰뺨검둥오리를 만나러, 남원읍 태흥리 바다를 방문했다. 부리와 눈 그리고 다리와 발가락을 제외하곤 온통 흰색이다. 해안도로에서는 연인들과 마라토너들이 겨울 바다와 겨울철새에게 안부를 전하고, 저 멀리에선 해녀 삼촌들과 올레지기들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새들도 오랜만에 맞는 햇살에 낮잠을 즐겼으며, 번식기를 맞은 어미들은 설렘으로 가득했다. 흰 오리를 찾느라 해안도로를 걷다가, ‘선긋불턱’에 멈췄다. 큰 불턱과 작은 불턱이 구분지어 있었는데, 작은 불턱은 나이 드신 해녀들을 위한 별도의 공간이다. 제주의 해녀들은 머리카락이 하얗게 변할 때까지 바다와 동고동락하기 때문에, 불턱에도 어르신을 위한 배려와 양보의 미덕이 담겨있다. 이 세상 모두가 하얀 세상을 꿈꾸며 살아간다 생각하니, 세상살이가 때 묻지 않은 낙원이었으면 간절히 빌어본다.
절실함이 통했는지 하얀 오리가 눈에 들어왔다. 쌍안경으로 확인하고 카메라에 담으려니 선명하지 않았다. 좀 더 접근하려는 찰나에 날아오른다. 정상적인 개체들 속이라 그런지 녀석의 정체가 아주 뚜렷했다. 언뜻 보면 갈매기와 헷갈려서 그냥 지나칠 수도 있다. 유별나게 하얀 옷을 입은 흰둥이는 잘못을 저지르고 태어난 게 아니라, 그저 돌연변이일 뿐이다. 평소 흰뺨검둥오리는 뺨과 눈썹선이 흰색이고 등과 날개는 어두운 갈색이다. 흰둥이가 정상적인 개체와 나란히 앉아 있으면, 전혀 다른 종으로 오인할 수 있다. 두 녀석의 홍채는 까만색, 부리는 검고 끝이 노란색, 다리와 물갈퀴는 주황색이다. 영락없는 흰뺨검둥오리이다. 태흥리 바다에서 월동하는 흰둥이는 루시즘(leucism)이라 하는 색소 결핍으로 태어난 돌연변이로, 깃털색이 하얀 색일지라도 시력을 포함한 먹이활동, 비행, 휴식 행동 등에서 정상적이다. 다만 흰색의 뚜렷함이 천적에게 노출되는 약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
한라산도 할망도 새들도 모두가 하얀 세상을 바라고 있음이 통하였을까. 하얀 조끼를 걸쳤음에도 하얀 통옷을 탐한 이유가 궁금하다. 아마 인간만이 누리는 백록담을 구경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하얀 산신령이 사는 세상에는 아무나 갈 수 없는 곳이기에, 흰둥이의 가슴 속을 애태우게 했던 것이었다. 혹 검독수리에게 잡히지 않으려면 하얀 눈 속으로 숨어야 하기에, 흰 옷이 제격이다. 흰뺨검둥오리의 변신은 새빨간 첩보가 아니고 하얀 보호색처럼, 평화로움을 추구하기 위한 위장이었다. 아직도 한라산 정상에 오르지 않은 사람이 백록담에 물이 고여 있다고 우기는 세상이다. 하얀 세상이 더러운 발자국으로 얼룩지지 않으려면 모두가 하얀 마음을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 어쩌면 변신을 택한 흰둥이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며, 혹여 흰둥이가 아프거나 다치면 큰일이다. 흰둥이의 소망과 무사안녕을 위해서라도, 도시의 하얀 가운들도 아름다운 꽃길을 포기하지 않기를 간곡히 빌어본다. <김완병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 학예연구사/이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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