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인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 만일 존재한다면 아마 <소멸되는 종(種)>이겠지. 머지 않아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을까. 사람들이 박물관에 뭘 비치할까. 안경일까”

지식인을 악마의 창녀로 묘사한 저널리스트 클레망의 이야기는 신랄하다. 숫제 빈정거림이다.
“풀을 되새김질하며…귀를 쫑긋이 세운 채…소처럼 꿈꾸는 자…천사의 입을 하고…장식 못이 박힌 개 줄에 매여 있는 푸들 강아지…창녀용 검은 장갑…”

지식인은 위기인가

 정녕 오늘의 지식인은 위기를 맞는가. 정계에 진출하는 교수가 많고, 관계에 뛰어들어 한 자리하는 지식인도 많은데 ‘위기’라니, 그것은 가당찮다. 각종 매체에 주옥같은 글을 쏟아내는 지식인은 또 얼마나 많은가.

그럴수록 그것에 비례하여 ‘위기의 지식인’이 거론되는 이유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정계와 관계에 진출하는 지식인들의 도덕적 해이, 연구비 유용, 교수 채용비리, 각종 위원회에서의 눈치보기, 낱말과 이미지를 기막히게 버무려 글쓰는 지식인 등등….

정치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수업을 팽개치고 퇴직은 고사하고, 최소한의 휴직마저 마다한 교수들에게 이미 지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지켜야 할 금도(襟度)도 없다. 정수(精髓)를 전달하기보다는 향기만이 가득한 글쓰기, 그리고 들러리… 그 밖의 말은 오히려 부질없다.

낙선하면 돌아 갈 곳이 있다. 아니다싶으면 훌훌 털고 복직할 수 있다. 이 얼마나 편리한가. 그들은 자신의 공과(功過)를 아랑곳하지 않는다. 아니, 공(功)은 뻔질나게 강조하면서도 과(過)에 대해서는 애써 눈을 감아 버린다. 거미처럼 발을 뻗치면 그만이다. 어떤 것에 대해서나 무책임하게 떠들 수 있는 입이 있다. 부동의 이성(理性)으로 영원불변한 이상(理想)을 추구하기를 바라는 것은 우리의 지나친 욕심이다.

어쩌면 시대 흐름에 영합하려면 이성은 거추장스러운 것인지 모른다. 알레로그 비바체를 좋아하는 그들에게는 단순화된 처방과 사물의 껍데기만 보는 것이 출세에 유리할지 모른다. 경쾌하고 빠르게. 그래서 느리지만, 비판적 이성을 생명으로 하는 참다운 지식인들은 자꾸만 뒤로 밀린다.

반성할 줄 모르는 지식인

절제는 그만큼 권태로운 것인가. 그들은 도무지 뉘우치는 법이 없다.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깊은 회한에 빠져 고뇌하는 모습은 둘째치고, 잘못된 흔적을 닦아내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입만 열면 얕은 이론으로 대중을 가르치려 든다.

모든 사람은 현실 인식에 있어 어느 정도 평등하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모든 사람은 나름대로 현실태를 구성할 능력이 있다. 그럴진대 도덕성을 갖추지 못한 주제에, 좀 더 안다고 대중을 가르치려 드는 것은 한마디로 주제넘다.

아는 것과 깨닫는 것은 별개다. 지식은 분별력을 의미하지 않는다. 뛰어난 학문적 지식이 곧바로 시대상황을 인식하는 지성으로 연결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연민과 체념사이에서 머뭇거린다. 오늘날의 일부 지식인의 행태는 시대의 산물일 수 있기 때문이다.

문자시대에서 영상시대로 바뀌면서 그만큼 박자도 빨라졌다. 길게 호흡할 틈이 없다. 되도록 짧게 호흡해야 한다. 오늘 말한 것이나 기록한 것은 내일이면 지워버린다. 금새 배출해야 하는 데 생각하고 반성할 틈이 어디 있겠는가.

그렇다면 학문 밖에서 온 정력을 쏟아내는 오늘의 일부 지식인들에게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통찰력의 수준을 평소 목소리의 크기로 맞춰달라고 하면 눈을 부라릴지 모른다. 그러나 변함없이 거시적이고 종합적인 시각을 목소리에 맞추어야 한다.

창조적 회의를 추구한다면

희망은 환멸에 비례한다. 나는 가정법(假定法)으로 그것에 답한다. 만일 사실의 세계를 진실의 세계로 착각하지 않는다면. 만일 일탈적 현상이 아닌, 꾸준한 흐름을 읽고, 배우가 아닌 줄거리를 보려고 시도한다면. 만일 일상성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창조적 회의와 비판을 추구한다면.

만일 지배자들의 부당한 기득권을 강화하려는 허위의식을 꿰뚫어 볼 수 있다면. 만일 이럴 수만 있다면 그들도 이 시대가 요구하는 지식인으로 평가받을 수 있을 것이다. 최소한 “시골길에 버려진 뱀의 허물처럼 하찮은…”이라는 비난만큼은 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나친 동어반복일 뿐인가. 지금 이 글을 쓰는 나는?

그 누가 이야기했듯 “고발한 자는 자신이 고발하고 비난했던 짓을 스스로 저지르는 것이 보편적 현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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