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기부 행복한 제주 <76>
장예식·여효순 부부

▲ 장예식(65)씨가 아내 여효순(57)씨와 함께 현재 운영하고 있는 숙박업소 앞에서 웃어 보이고 있다.

숙박업소에 ‘빵굽터’ 조성
빵 만들어 소외이웃에 전달
최근 조손가정 아이 후원도

도남동 숙박업소 ‘성우장’. 이곳 지하에는 특별한 것이 있다.

계단을 따라 한 층 내려가자 반죽기, 오븐, 트레이 등 빵집에서나 볼 수 있는 기계들이 보인다. 모두 장예식(65)씨가 들여온 것들이다. 개인적 취미 혹은 장사를 위해서가 아니다. 돈이 아닌 색다른 기부가 이뤄지는 여기는, ‘기부의·기부에 의한·기부를 위한’ 빵이 구워지는 곳이다.

장예식씨는 본래 ‘빵집 아저씨’였다. 젊었을 때 제주시민회관 옆에서 35년여 동안 빵집을 운영했다. “그 빵집을 하는 시절 내내 쿠키나 빵, 케이크를 만들어 외도 보육원, 외도 요양원 같이 도움이 필요한 곳에 며칠마다 드렸죠”

그는 재료비 하나 받지 않으면서 빵을 만들었고, 그렇게 소외된 도내 이웃들의 주린 배를 채워줘 왔다.

장씨가 사비를 털어 만든 빵을 기부해 온 까닭은 어린 시절의 외롭고 괴로웠던 경험 때문이다. 갓난 아이 때 어머니가 집을 떠나 할머니 밑에서 자란그는 가난하게 살았다. “열네살 때 집을 나와 제과점에서 일을 배우기 시작했어요. 물지게로 물을 길어 주고 빵을 배우며 한 달 500원을 받았어요.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어렵게 살다 보니, 부모 없이 큰 애들을 보면 내 가슴이 미어지더라고요”

그는 빵집을 차린 후 보육원에서 자란 아이들을 몇 명씩 데려와 가게에 채용했다. 출생신고조차 안 된 무적자 아이들을 위해 자신이 보증인이 되어 법원에서 도장을 눌러주곤 했다.

그 아이들에게 문제가 생기면 장씨에게 책임이 돌아왔다.

“도망가는 아이들도 있긴 했죠. 그래도 그 아이들을 도와줄 수 있었다는 자체가 좋았어요”

1998년 말, 제주에서 우연히 만난 지금의 아내를 따라 장씨는 서울로 올라갔다.

봉사와 기부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가진 아내와 함께 ‘할매김밥’을 차려 그곳에서도 따뜻한 손길을 이어갔다. “김밥 백 줄, 샌드위치 쉰 개, 햄버거 서른개 등 아이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어 가게 근처 고아원에 갖다 줬어요”

2년 후 그는 아내의 손을 잡고 무일푼으로 제주에 돌아왔다. 돈이 없던 그는 화북에 위치한 동생의 과수원 안 컨테이너에서 지냈다. 아내와 함께 허리띠를 졸라매며 살았고, 형편이 차차 나아져 2년여 전 지금의 숙박업소를 차리게 됐다. 건물을 새로 꾸밀 때 제일 먼저 생각한 것은 바로 빵 만드는 기계였다. “기계 값이 얼마든 상관없었어요. 아내와 저는 돈이 부족해도 남을 도우며 살고 싶은 마음뿐이었으니.” 한 달에 재료값이 30만원 이상 들어도, 그는 대가를 바라지 않으며 경로당과 복지관 등에 카스텔라, 롤빵 등을 만들어 전달하고 있다.

빵 굽는 숙박업소를 곱게 보지 않는 시선도 존재했다. 불법장사, 위생 불량 등 주변에서의 신고로 시청에서 조사를 나왔었다. “그분들께 절대 더러운 기계, 나쁜 재료로 만든 빵을 드릴 순 없어요. 철저히 깨끗하게 하는 것이 제 철칙입니다”

이제는 그의 선행이 퍼져 신고당하는 일은 거의 없지만, 그때 생각을 떠올리면 가슴이 아프다. “그들은 우리들보다 더 좋은 것만 먹어야 하는 분들이에요…”

장씨는 최근 조손가정 아이들을 후원하기 시작하면서 기부의 영역을 점점 넓혀가고 있다. “내 나이 예순 다섯, 가방끈이 짧지만, 많이 쓰러져보고 많이 아파보고 많이 돌아다니며 삶을 배웠습니다. 내 남은 생애동안 아내와 함께 남들을 돕다가 죽을 겁니다.” 도남동 숙박업소 지하, 특별하고도 행복한 빵 냄새가 풍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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