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항쟁 75주년 강정마을 4·3길 답사⓵ 프롤로그
강정마을 중문면 마을서 4·3희생자 가장 많아
64년만에 나타난 육지 경찰 학살의 아픔 들춰

강정은 아직도 남한 정부에 의해 진행 중인 4·3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제주해군기지 건설이 4·3의 연장선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국가권력이 나서 불법을 자행했으며, 무엇보다 폭력과 폭언이 난무했기 때문이다. 제주4·3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도민연대는 지난 16일 서귀포시 강정마을 4·3길을 순례했다. 제주매일은 강정마을의 4·3유적지를 5회에 걸쳐 보도한다. [편집자 주]
16일 강정마을 4·3길 순례에 나선 도민들이 제주해군기지 정문 앞에서 해군기지 반대 깃발을 들고 있다.
16일 강정마을 4·3길 순례에 나선 도민들이 제주해군기지 정문 앞에서 해군기지 반대 깃발을 들고 있다.

제주해군기지는 강정마을에 들어서기로 결정돼 갈등을 거듭한 지 9년 만인 2016년 2월 26일 완공됐지만, 지금도 해군기지를 반대하는 노란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제주4·3과 강정마을은 많이 닮았다. 수많은 민중이 국가폭력에 대한 항쟁에 나섰기 때문이다.

4·3사건 당시 중문면(강정, 대포, 도순, 상예, 색달, 영남, 월평, 중문, 하예, 하원, 회수) 마을별 희생자는 올해 3월말 기준으로 754명이다. 이 가운데 강정마을이 178명으로 가장 많다. 당시 서북청년단원에 이어 서청 특별중대까지 들어섰던 중문마을(114명) 보다 훨씬 많은 희생자가 나왔다.

4·3 인명피해가 많은 마을은 제주 중산간에 위치하고 계엄령의 초토화작전으로 전 마을 가옥이 불타고 주민들이 학살당한 경우가 많다. 그러나 강정마을은 중산간이 아닌 일주도로에 접한 해안에 있다. 중산간 마을처럼 가옥들도 불타지 않았음에도 인명피해는 중문면에서 가장 많다.

당시 강정마을 인명피해는 1948년 11월 17일 포고령 이전부터 발생했다. 특히 주민들이 3·1 집회와 3·10 총파업에 적극 참여했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강정마을은 “우는 아이에게 곤밥을 줘도 울음을 그치지 않는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도내 쌀 생산량이 가장 많았다. 당시 유격대에게 식량을 제공한 개연성과 유격대의 활동이 다른 마을보다 활발했던 사실 등은 군경에 찍힌 마을이 돼 중문마을에서 가장 많은 피해를 입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양동윤 4·3도민연대 대표는 “강정마을 사람들은 1947년 제28회 3·1절 기념식을 성대하게 치렀다. 이날 육지 경찰의 총격으로 제주 사람 6명이 죽고 6명이 총상을 입었다”며 “사람들은 총파업으로 맞섰지만 폭동으로 몰렸고 결국 4·3이 터졌다”며 “강정 사람은 178명이 희생됐는데 아직 파악되지 않은 희생자가 있는 것을 감안하면 더 많은 이가 죽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양 대표는 “4·3 이후 64년만에 다시 강정마을에 나타난 서울·경기경찰청 경찰 병력이 자꾸만 거슬린다”고 말했다.

제주도민들에게 ‘육지 경찰’은 4·3 당시 잔혹한 학살을 자행했던 ‘응원 경찰’을 연상케 한다는 점에서 해군기지 건설 찬반을 떠나 모든 도민들에게 학살의 아픔을 다시 들췄다는 지적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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