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항쟁 75주년 강정마을 4·3길 답사 ②잃어버린 마을
궁산 주민들 ‘소개령에 마을 피신 목숨 부지’ 기구한 인생
‘신마을’ 용흥리 조성…4·3희생 주민들 기리는 충의비 건립

용흥마을회관 오른편에 건립된 4·3충의비와 충혼비. [사진 = 김진규 기자]
용흥마을회관 오른편에 건립된 4·3충의비와 충혼비. [사진 = 김진규 기자]

궁산(弓山)마을은 4·3사건 이후 주민들이 돌아오지 않아 잃어버린 마을이 되고 말았다. 4·3사건 이전에는 마을이 활처럼 생겼다고 해서 궁산이라 불렸다.

위치는 서귀포시 용흥로(강정동) 66번길 163-17번지 일대다. 유명 가수 ‘JYJ’의 시아준수(본명 김준수)가 대표를 맡았던 토스카나 호텔이 들어선 곳으로, 현재 공터 일부는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었고, 나머지 지역은 수풀이 무성해 옛 마을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윤신민 용흥동 전 노인회장(77세)은 “ 4·3당시 20여 가구가 살았지만 지금은 호텔들과 하우스가 들어서 있어 그때 모습은 영영 가늠할 길이 없다”고 말했다.

궁산마을 주민들이 소개령에 따라 마을을 떠난 것은 1948년 11월 말이다. 인근 월산마을로 피신했지만 유격대의 공격으로 궁산마을 주민과 월산마을 주민들은 냇팟마을(신흥리)로 거처를 옮겼다.

궁산마을 주민이었던 박춘호 씨(71세)는 고향에 다시 돌아가지 않은 이유에 대해 “다시는 산촌(궁산마을)에 살고 싶지 않다”고 답했다.

당시 궁산마을 주민들은 이곳저곳으로 피신하며 목숨을 부지했지만, 당시 강창호(27세)·이성옥(31)씨는 끝내 살아오지 못했다.

용흥리는 4·3사건 이후인 1952년부터 형성된 신(新)마을이다.

강정마을은 1구와 2구로 조성됐다. 한라산 쪽은 2구, 바닷가 쪽은 1구로 형성됐다. 강정 2구는 염돈과 월산, 냇팟마을로 이뤄졌다. 2구 마을에 유격대의 잦은 출몰로 1구 마을은 곧바로 축성이 이뤄졌다. 2구 마을주민들은 1구 쪽으로 소개됐다. 1952년 이후 소개 주민들은 다시 살던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냇팟, 염돈, 월산, 궁산마을 주민들은 살던 곳으로 가지 않고 용흥마을에 정착했다.

박춘호 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살던 곳은 나무가 우거지고 사방이 막혀 확 트인 곳으로 재건하고자 의견이 모였습니다. 여기 마을이 들어선 곳은 허허벌판으로 사람이 살았던 곳이 아니었어요. 우리는 먼저 성을 쌓고 마을 이름을 ‘용흥리’라고 지었습니다. 용흥리 마을 동쪽에 복용(伏龍) 동산이 있었는데 형상이 엎드려 있는 용이어서 언젠가는 일어서지 않겠는가 해서 용흥리라고 명명했습니다.”

용흥마을회관 옆에는 4·3충의비와 한국전쟁 희생자를 기리는 충혼비가 나란히 건립돼 있었다. 4·3충의비에는 냇팟 염돈, 월산마을 등 유격대 공격으로 숨진 주민 31명 이름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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