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항쟁 75주년 강정마을 4·3길 답사④ 먹쿠실낭 동산·서울밧
“역사 현장 유적지 답사 막대한 예산 투입…정작 안내판은 전무”
학살터 주변 주택가로 변모…서울밧 지금도 넓은 공터만 덩그러니

예전 ‘먹쿠실낭 동산’이라고 불렸던 지역이다. 용흥마을회관에서 용흥로 66번길로 이어지는 한라산 방향 삼거리에 있는 모서리 공터로 먹쿠실낭은 없다. [사진 = 김진규 기자]
예전 ‘먹쿠실낭 동산’이라고 불렸던 지역이다. 용흥마을회관에서 용흥로 66번길로 이어지는 한라산 방향 삼거리에 있는 모서리 공터로 먹쿠실낭은 없다. [사진 = 김진규 기자]

4·3사건 당시 큰 먹쿠실 나무가 있어 ‘먹쿠실낭 동산’이라 불렸던 이곳은 교전지였다.

이곳은 한라산 쪽에서 강정 해변마을까지 이어지는 골목길이어서 당시 민보단(경찰의 하부·지원조직)의 경비는 철저했다.

유격대는 1948년 12월 11일 이곳을 공격했다. 보초를 서던 민보단은 죽창과 사제수류탄으로 대항해 유격대 1명을 사망케 했지만 민보단의 희생은 컸다.

이날 유격대의 공격으로 숨진 주민은 강정리의 김기돌(50세)과 김봉원(53) 등 무려 13명이나 됐다. 다른 마을주민인 상모리의 오남춘(17세), 영남리의 김창훈(27세) 등 17명도 희생됐다.

당시 인근 도순국민학교에 주둔 군인들이 출동하자 유격대는 곧바로 퇴각해 더 이상 주민 피해는 면할 수 있었다.

먹쿠실낭 동산은 용흥리마을회관에서 용흥로 66번길로 이어지는 한라산쪽으로 200여m 삼거리에 있는 모서리 공터이지만 먹쿠실낭은 없다. 제주4·3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도민연대가 강정마을4·3 순례 이전에 사전 답사에 나섰지만 현장을 찾기 어려웠던 이유다.

양동윤 4·3도민연대 대표는 “윤신민(77세) 용흥동 전 노인회장과 이곳 주민인 이창용씨(66세)의 안내 없이는 그 현장을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며 “먹쿠실낭은 4·3 이후 여러 차례 식재됐지만 지금은 도로 확장으로 베어내고 말았다”고 말했다.

양 대표는 “먹쿠실낭 동산에 먹쿠실낭도 없다. 이곳은 민보단과 유격대의 격전지였고 주민 희생이 컸던 4·3역사 현장임에도 아무런 표시도 없다”고 씁쓸해 했다.

양 대표는 “행정당국은 4·3유적지 답사를 위해 많은 예산을 사용하지만, 정작 4·3유적지에는 번번한 안내판도 없다. 안내판 설치에 많은 돈이 드는 것도 아니”라며 “4·3기록물을 세계기록유산 등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집안(제주도내)일부터 챙기는 것이 순서”라고 말했다.

강정동 말질로 일대. 4·3사건 당시 서울밧이라고 불렸으며 집단 학살지였다.  지금은 텅빈 공터로 남아있다.   [사진 = 김진규 기자]
강정동 말질로 일대. 4·3사건 당시 서울밧이라고 불렸으며 집단 학살지였다.  지금은 텅빈 공터로 남아있다.   [사진 = 김진규 기자]

서귀포시 강정동 말질로 161번길 14-1, 14-2 일대는 ‘서울밧’이라고 불렸던 집단학살 현장이다. 서울 사람이고, 서울에서 살다 온 사람의 밭이라고 해서 ‘서울밧’으로 불렸다.

1948년 11월 21일 군경은 이곳에서 100m 떨어진 강정향사에서 주민들을 집결시키고, 서울밧으로 끌고가 사살했다. 당시 처형된 젊은이들은 강명효(26세), 고대성(24세) 등 29명인 것으로 알려졌다.

서북청년단은 서울밧 학살 이후에도 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청년들을 잡아들여 염돈마을 지경으로 끌고가 총살시켰다. 학살터 주변은 주택가로 변했지만 서울밧은 지금도 넓은 공터로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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