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쟁 75주년 중문마을 4·3길 답사] 프롤로그①
중문마을 123명 희생…무장대 아닌 도피자 가족 학살
이승만·미 군정 세력 등에 업고 무소불위 권력 휘둘러

올해 75주년을 맞은 제주4·3은 그 어느 때보다 어수선했다. 4월이 다가오기 전부터 태영호 최고위원의 ‘4·3색깔론 망언’에 이어 수구정당이 제주도 전역에 내건 수십 개의 현수막 게첨, 느닷없는 자칭 ‘서북청년단’ 등장 때문이다. 제주4·3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도민연대는 8일 ‘서귀포시 중문마을 4·3길’을 답사했다. 함께 동행 한 제주매일은 서청의 실태와 4·3 실상이 서린 유적지를 6회에 걸쳐 보도한다. [편집자 주]

 

‘서귀포시 중문마을 4·3길’ 답사에 동행한 도민들이 서귀포시 천제연 폭포 주차장 인근에 건립된 중문면 4·3희생자 위령비를 둘러보고 있다. [사진 = 김진규 기자]
‘서귀포시 중문마을 4·3길’ 답사에 동행한 도민들이 서귀포시 천제연 폭포 주차장 인근에 건립된 중문면 4·3희생자 위령비를 둘러보고 있다. [사진 = 김진규 기자]

중문마을은 해방 직후부터 미군정과 응원경찰에 의한 무차별적 체포와 총격사건으로 민심은 어수선했지만 4·3, 5·10선거와 송요찬 연대장이 포고령을 발동한 10월 17일 이전까지는 별다른 사건이 없었다. 그러나 1948년 11월 5일 유격대(무장대)가 중문마을을 기습, 중문학원과 중문면사무소 등 그 주변 민가 30여 채를 불태웠다. 이로 인해 중문국민학교에는 군부대가 주둔했고 중문지서에는 응원경찰과 서청단원으로 병력이 대폭 보강됐다. 제주에 내려온 서북청년단은 경찰과 군인이 돼 특별중대 대원이 됐으며, 또 민간 신분으로 남은 서청단원들과 함께 제주도민들을 섬멸하는 토벌의 핵심전력이 됐다.

중문마을에는 서봉호 소위의 1개 특별중대가 주둔했다. 군과 경찰들이 주둔한 제주해안 마을인 중문에서 다른 해안마을과 달리 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한 것은 매우 드문 사례다. 해방직후부터 중문마을은 활발했던 3·1사건과 3·10 총파업 등 발생했던 사건들로 인해 군경부터 미운털이 박혔기 때문이다.

당시 중문 2구 주민이었던 원용두씨는 당시 마을분위기와 피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해방 후 중문면을 대표하는 유지급은 이봉옥(중문면장 역임), 김성추(민청위원장), 김승하(구장 역임) 등이 모두 중문 2구 분들이고, 대부분 민청에 가입했던 청년들은 군경 토벌을 피해 산으로 간 후 대부분 희생됐어요. 이 때 숨진 청년들은 80명이 넘습니다.”

송요찬의 10월 17일 포고령 발동 직후 12월 17일까지 군경과 서북청년단에 의해 무참한 학살이 자행된다.

미군정은 12월 17일 사건에 대해 “교체를 앞둔 9연대가 마지막 토벌작전을 벌였다”고 보고했지만, 실상은 인민유격대(무장대)를 상대로 토벌한 것이 아니라 도피자 가족이란 이유로 3세, 4세, 5세, 7세 어린아이와 60세와 70세가 넘는 노약자를 일본 신사터 소낭밭에서 무참히 학살한 것이다. 아래 주민들도 중문신사터에서 죽임을 당했다.

지난해 12월 기준 4·3 사건 당시 중문마을 희생자는 123명으로 사망자 84명, 행방불명자 37명, 수형인 2명으로 집계됐다.

서청이 제주도에 들어온 시기는 1947년 3·1사건 직후로 유해진이 제주도지사로 부임하면서 경호원 격으로 들어온 데서 시작됐다. 4·3발발 직전까지 입도한 서청은 500~700명 정도로 추산된다.

당시 서청의 위세는 하늘을 찌르고도 남았다. 배후에 이승만과 미군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계급장도 없는 군인 아닌 군인이었지만 9연대 헌병이나 장교들도 간섭하지 못할 정도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렸다.

1948년 11월 9일 제주도 총무국장이었던 김두현(당시 53세)씨도 서청의 고문으로 숨졌다. 제주도청 2인자가 보급 문제에 불만을 품던 서청단원들에게 폭행으로 숨진 것이다.

서청은 평남청년회, 함북청년회, 함남대한혁명청년회 등 북한 출신 청년단체가 통합해 1946년 11월 30일 서울에서 결성됐다. 이들 조직은 ‘조국의 완전 자주독립 전취’ 등의 강령을 내세웠지만 이승만 정권 반대 세력 척결을 공식화 한 것이다. 서청은 자신들에게 마음이 들지 않거나 거슬리면 곧바로 족쳐댔다. 이러면 이들을 구명하기 위한 가족들에게 의해 부수입이 생기기 때문이다. 서청의 이러한 작태는 4·3 전 기간에 걸쳐 자행됐으며 제주도민들의 목숨을 파리 잡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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