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쟁 75주년 중문마을 4·3길 답사] 4·3기념성당·서청사무실③
80대 노인부터 갓난아기까지…총71명 17회 걸쳐 학살
‘신앙서 제주4·3 기억 새로운 평화 초석’ 십자가에 숙연

천주교 제주교구 4·3기념 성당 입구에서 바라본 서청사무실 터. 성당 길 건너 맞은편 호텔 건물이 서청사무실이었다. [사진 = 김진규 기자]
천주교 제주교구 4·3기념 성당 입구에서 바라본 서청사무실 터. 성당 길 건너 맞은편 호텔 건물이 서청사무실이었다. [사진 = 김진규 기자]

천주교 제주교구 4·3기념 성당은 서북청년단 사무실 터와 길 건너 맞은편에 자리했다. 불과 50m도 채 안 되는 거리를 마주한 전경에 아이러니 했지만, 당시 참혹했던 역사를 들으니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4·3기념 성당은 일제강점기 일본인의 민간종교인 신도(神道)의 사원, 즉 ‘신사 터’였다. 신사 터는 해방 직후 중문지역 주민들로부터 파괴됐다.

당시 신사 터는 지금과 달리 소나무 등 숲이 우거진 으슥한 곳이어서 4·3당시 군경과 서북청년단은 이 장소에서 일상적으로 중문면 주민들을 학살했다.

군경과 서청은 1948년 10월 21일부터 1949년 1월 8일까지 중문리 주민 34명, 강정리 6명, 대포리 1명, 도순리 2명, 상예리 2명, 상천리 5명, 색달리 17명, 하예리 2명, 하원리 1명, 회수리 1명 등 71명을 17차례에 걸쳐 처형했다.

주민 대부분이 ‘도피자 가족’으로 몰려 80대 노인부터 갓난아기까지 이곳에서 학살됐다.

중문 신사 터는 1957년 천주교 중문 건립으로 당시 흔적을 찾을 수 없었지만 4·3기념 성당 정문부터 교회 문 앞까지 곳곳에 4·3기념유적지를 알리는 표지판과 안내문이 자리했다.

특히 4·3기념 십자가가 인상적이었다. 한라산 아래 군경이 쏜 총탄에 맞아 고통스러워하며 죽어간 도민들의 모습과 수많은 시신 더미 등이 새겨 있었다. 성당이 제주4·3을 신앙에서 기억하고 이를 새로운 평화의 초석으로 삼기 위해 2018년 10월 11일 십자가를 세웠다.

지난 8일 제주4·3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도민연대(대표 양동윤)가 진행한 4·3길 답사길 동행자들은 이를 보자 숙연한 표정으로 묵념하기도 했다.

양동윤 대표는 “중문 신사 터는 4·3당시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지만 4·3영령을 위로하고 슬픈4·3역사를 기억하는 매우 의미 있는 4·3순례의 성지”라고 평가했다.

길 건너 맞은편의 서북청년회 사무실 옛터에는 ‘유적지’라는 안내판이 설치됐다. 안내판에는 ‘중문리에 서청이 집단적으로 머문 것은 4·3 발발 1년 전부터로 10여명 정도가 기거하면서 민가에 태극기 등을 큰돈에 강매하는 등 횡포를 일삼았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는 등 서청의 폭압은 끊이지 않았다’고 적혀 있었다. 서청이 기거했던 사무실 터에는 현재 호텔이 들어섰다.

천주교 제주교구 4·3기념 성당 전경
천주교 제주교구 4·3기념 성당 전경
천주교 제주교구 4·3기념 성당에 세워진 4·3기념 십자가.
천주교 제주교구 4·3기념 성당에 세워진 4·3기념 십자가.
천주교 제주교구 4·3기념 성당에 설치된 4·3기념 유적지 안내판
천주교 제주교구 4·3기념 성당에 설치된 4·3기념 유적지 안내판
서북청년회 사무실 옛터에 세워진 유적지 안내판 
서북청년회 사무실 옛터에 세워진 유적지 안내판 
서북청년회 사무실터에 호텔이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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