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쟁 75주년 중문마을 4·3길 답사] 버리왓·중문중④
‘총살 뒤 참수’ 목격한 초등생들 시대배경에 무덤덤
“목숨 부지하려 기념비 건립…비참한 나날이었을 것”

서귀포시 천제연로 239번지 이곳 중문초등학교 동쪽 밭 지경의 ‘버리왓’은 4·3사건 당시 학살터였지만, 현재는 주공아파트 등 주택단지가 들어서 있어 당시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사진 = 김진규 기자]
서귀포시 천제연로 239번지 이곳 중문초등학교 동쪽 밭 지경의 ‘버리왓’은 4·3사건 당시 학살터였지만, 현재는 주공아파트 등 주택단지가 들어서 있어 당시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사진 = 김진규 기자]

서귀포시 천제연로 239번지 이곳 중문초등학교 동쪽 밭 지경의 ‘버리왓’은 4·3사건 당시 상예리 주민 문석중·문순희·허유인·오경생·김승옥씨 등이 학살된 장소다.

4·3사건 당시 중문초등학교 학생이었던 원응두씨는 목격했던 학살 장면을 이같이 증언했다.

“토벌대는 학교 옆 버리왓에서 총살할 때 우리를 모두 학교 밖으로 나오게 해 구경시켰어요. 토벌대는 산에서 사람을 잡아오면 효수(과거에 죄인의 목을 베어 높은 곳에 매달아 놓는 형벌)해 전신주 위에 (목을) 매달았어요. (당시 시대가) 워낙 난리통이어서 이를 봐도 우리는 무덤덤했습니다.”

당시 이곳에서 희생된 상예리 주민은 1948년 10월 23일 문석중, 같은 해 11월 13일 문순희, 같은 해 11월 17일 허유인·오경생·김승옥 등이 확인됐다.

‘버리왓’은 배(어선)가 포구에 들어오면 닻을 내리고 ‘버리줄’로 고정시켜 움직이지 않도록 하는데 이곳 지형이 그 ‘버리’에 해당된다고 해서 붙여졌다.

4·3 당시에는 ‘동문성’이 있었던 곳이지만 지금은 사라졌고, 지금은 주공아파트 등 주택단지가 들어서 있어 당시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중문중학교 교정 서쪽 길옆에 기념비와 송덕비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사진 = 김진규 기자]
중문중학교 교정 서쪽 길옆에 기념비와 송덕비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사진 = 김진규 기자]

4·3당시 2연대 1대대는 서귀포에 주둔했는데 중문리에는 4중대 4소대가 주둔했다. 이때 대대장은 전부일, 중대장은 남백봉, 소대장은 서봉호였다.

중문지역 주민들은 당시 중학교가 불에 타버린 중문중학교를 재건축하는데 목재를 지원해줬다는 공로로 4중대 4소대 군인 이름이 새겨진 기념비와 송덕비를 세웠다. 기념비는 도민들이 학살된 버리왓에서 불과 200여m 떨어진 지점이다.

제주4·3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도민연대(대표 양동윤)는 지난 8일 4·3길 답사 시 중문중학교를 방문했는데 지금도 학교 교정 서쪽 길옆에 기념비와 송덕비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었다.

제주도민을 무차별 학살한 군인들을 기리기 위한 기념비라는 점에서 치욕의 역사라는 평가가 나온다.

양동윤 대표는 “아무리 오욕의 역사라 해도 가증스러운 비석임은 틀림없다”며 “기념비에는 4·3당시 소대장 육군소위는 소령 계급으로 새겨졌다는 것은 짧은 기간에 주둔지를 옮겨 다닌 것이 아닌 상당기간 중문마을에 주둔했다는 것인데, 그 기간에 겪었을 주민들의 고통은 짐작할 수 없을 만큼 비참한 나날이었을 것”이라고 개탄했다.

제주시 봉개마을(당시 봉개리)이 당시 제2연대 연대장인 함병선 이름을 딴 ‘함명리’로 마을 명칭을 변경하며 목숨을 부지하려했던 서글픈 역사가 이곳 중문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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