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쟁 75주년 중문마을 4·3길 답사]천제연 폭포⑤
유족 “통한의 세월에도 화해와 상생으로 미래 맞아야”
“관광지로만 인식 안타까워…역사적 아픔 잊지 않겠다”

‘서귀포시 중문마을 4·3길’ 답사에 동행한 도민들이 서귀포시 천제연 폭포 입구에 건립된 4·3위령비를 둘러보고 있다. [사진 = 김진규 기자]
‘서귀포시 중문마을 4·3길’ 답사에 동행한 도민들이 서귀포시 천제연 폭포 입구에 건립된 4·3위령비를 둘러보고 있다. [사진 = 김진규 기자]

천제연 폭포는 제주의 관광지로 널리 알려졌지만 4·3 사건 당시 무고한 도민들이 학살된 역사적인 아픔을 간직한 유적지다.

지난 8일 제주4·3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도민연대(대표 양동윤)가 천제연 폭포를 방문할 당시 많은 관광객들로 넘쳐났지만, 일제강점기에는 소와 돼지를 잡는 도살장이 있었고 면사무소도 위치했던 곳이다.

넓고 으슥한 지형이어서 4·3당시 36명의 주민이 이곳으로 끌려와 총살됐다.

1949년 1월 4일 군인들이 소위 ‘명부’를 들고 마을을 다니면서 명단에 있는 사람들을 끌고 가 집단 학살한 것이다.

이날 남편을 잃은 중문동의 임춘득 씨의 증언 기록을 보면 4·3당시 참혹한 실상을 알 수 있다.

“남편이 총살될 때는 대포리 상동 주민들이 회수리로 소개해 살던 때입니다. 남편이 중문리로 끌려가자 난 저녁밥을 준비해 찾아갔지요. 그런데 유치장에는 남편이 없었습니다. 불안한 마음에 서성거리는데 갑자기 총소리가 요란하게 났습니다. 남편이 총살당하는 소리라는 걸 알고는 눈물이 쏟아져 제대로 서 있지도 못했습니다. 급히 현장에 가 보니 쇠줄로 목이 묶인 채 총에 맞은 36구의 시신이 나뒹굴고 있었습니다. 남편은 무고합니다. 남편은 당시 경찰이던 5촌 삼촌(송두석 경사)의 권유로 경찰에 지원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또 다른 5촌 삼촌이 입산한 것에 연루됐다고 하더군요. 그러나 그 5촌 삼촌은 진작부터 대정골에 양자로 들어 남편과는 얼굴도 잘 모르던 사이였습니다. 총살장에서의 상황은 그 자리에서 총 한 발 맞지 않고 구사일생한 이문기 씨에 의해 알려졌습니다. 이문기 씨에 의하면 총살 직전에 일부는 ‘인민공화국 만세!’를 외쳤고, 일부는 ‘대한민국 만세!’를 외쳤다고 합니다. 토벌대는 ‘이 놈은 대한민국 만세라고 했지만 제 친척에게서 물이 들지 않았을 리 없다’면서 남편을 쏘았다고 합니다. 남편이 죽은 후에도 난 ‘총살자 가족’이라며 갖은 수모를 겪었습니다.(중략)”

천제연폭포 입구에 세워진 중문지회 4·3위령비에는 ‘통한의 세월이 흐른들 어찌 잊을 수 있으랴.(중략) 그럼에도 화해와 상생의 물소리가 돼 영원토록 흘러 이제 통한의 한을 씻어 내리소서’라는 문구가 새겨졌다. 유족회가 4·3특별법 제정과 노무현 대통령이 국가공권력 남용에 사과한 만큼 영령들도 용서·화해·상생의 마음으로 미래를 맞자고 호소한 것이다.

도민연대와 4·3길 답사자들은 위령비를 찾아 묵념하면서 “비극의 장소를 관광지로만 인식하고 있는데 안타깝다”며 “후세들이 통한의 역사를 잊지 않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저작권자 © 제주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