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맨땅에 헤딩’ 하듯 일하며 부지런함으로 승부
공동체와 함께하며 제주인으로 성장하는 김가연 씨
“현재 일터 사람들 좋아 힘든 일도 눈 녹듯 사르르”
그녀가 처음 한국 땅을 밟던 2004년 4월 1일 새벽 한국에는 가랑비가 내렸다. 을씨년스럽기도 했던 그날을 김가연씨는 이렇게 기억했다. “중국 날씨가 좋지 않아 비행기가 지연되는 바람에 새벽에야 한국에 도착했다. 남편과 한국 땅을 처음 밟는데 비가 내려서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스물둘이던 김씨는 서른넷이던 남편 유병철씨 손을 잡고 시어머니가 거주하던 서울시 당고개로 향하는 택시에 몸을 실었다. 김씨는 띠 동갑인 남편을 두고 “도둑놈이 따로 없었다”고 웃음 지었다.
서울에 도착한 김씨는 친구도 가족도 없었다. 외롭고 무서운 게 당연했다. 외출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중국 연변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나마 집 가까운 곳에 남편보다 한 살 많은 시누이가 사는 곳에 자주 놀러 갔다. 김씨는 “지리도 어두웠고 두려워 집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걸어서 5분 거리에 살았던 시누이가 그나마 편하게 의지할 만한 친구 같은 존재였다”며 “힘들 때마다 나를 잡아준 시누이가 고맙다”고 말했다.
김씨와 유씨는 각박한 서울살이에 지쳐 더 나은 곳으로 가야겠다고 다짐하고 제주도로 향하기로 했다. 그렇게 김씨는 2005년 2월말 만삭의 몸을 이끌고 인천에서 제주로 향하는 세월호에 몸을 실었다. 제주에 도착한 김씨 부부가 처음으로 터를 잡은 곳은 제주시 애월읍 유수암리였다.
김씨는 “한국에 온지 1년 만에 2005년 4월 2일 제주도에서 큰 아이를 낳았다. 남편은 제주에 오자마자 한 건축사무소에 취직을 했다. 하지만 일자리가 없어지면서 100일도 채 되지 않은 아이를 업고 하귀로 이사했다”며 “그런데 그 집이 너무 열악했다. 추운 겨울에 바람이 들어와 아이가 감기를 달고 살았다. 그래도 크게 아프지 않아 다행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그때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고 기억했다.
남편 유씨의 고생도 컸다. 불규칙한 일자리 때문에 수입이 불안정했다. 김씨는 “남편이 일자리 때문에 고생이 많았다. 컴퓨터를 전공한 남편이 학원 강사도 했는데 그 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이후 건축사무소에 취직했는데 두 달 만에 부도가 났다. 결국 컴퓨터로 먹고살아야겠다는 판단에 3D 애니메이션 제작 사무실을 차렸다”며 “처음에는 근근이 입에 풀칠만 하며 살다가, 둘째를 임신하고 애월읍 상가리로 이사를 가면서 일이 잘 풀렸다. 생각해보면 둘째가 복덩이였다”고 말했다.
물론 남편 유씨가 적극적으로 발 벗고 나선 노력 덕분도 컸다. 김씨는 “일거리를 달라고 찾아가는 문화 자체가 생소했던 도민들이 남편의 노력을 인상 깊게 생각해 일거리를 주셨다. 그러면서 가정 형편이 조금 나아졌다”며 “남편의 생활력, 가정을 지키려는 의지가 매우 강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말했다.
김씨는 텅 빈 통장을 보며 눈물을 훔치기도 일쑤였다. 큰 아이가 갓난아이 때 분유 값도 없을 정도로 어려웠다. 심지어 통장에 ‘1만원’도 없어 인출조차 하지 못할 정도였다. 김씨는 “(남편이) 그게 몸에 뱄는지 집에 쌀이 없는 걸 가장 불안해한다. 그래서 지금도 쌀을 넉넉하게 구매하고 있다”며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남편 친구들이 5만원, 10만원씩 도와줘서 어려운 고비를 넘겼다. 아무래도 남편이 덕을 쌓고 잘 살았던 것 같다”고 웃음 지었다.
가정주부로 살던 김씨는 공부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2009년 공부를 시작해 5월 초등학교, 9월 중학교 검정고시에 잇따라 합격했다. 그 사이 셋째를 가졌고 2010년 초 임신한 몸으로 검정고시 시험을 봐서 통과했고 그해 6월 막내를 낳았다. 셋째를 낳은 뒤 1년이 지나 한라대학교 관광중국어과에 입학해서 2014년 2월 졸업했다. 이후 1년간 다문화센터에 근무하다 2015년 제주시 건입동으로 이사했다. 그해 5월 18일부터 현재 일터에서 근무하고 있다.
그는 “지금 일터가 사람을 대하는 일이라서 어려운 점도 많지만 사람들이 너무 좋아서 어렵고 힘든 일들이 눈 녹듯 사르르 사라진다. 박봉이지만 그래도 보람을 느끼고 있다”며 “이곳에서 제주의 문화와 정서, 제주의 사라들을 더 많이 알게 돼 참 다행이고 고맙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이곳에서 일하면서 많이 배웠다. 과거에는 뉴스를 보지 않았는데 지금은 드라마보다 뉴스를 더 많이 보고, 지난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남편과 정치를 주제로 토론도 했다. 일을 하고 사람들을 만나면서 사회를 보는 눈이 과거와 많이 달라졌다. 특히 사회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앞으로 계속 제주에 살겠다고 했다. 그는 “제주에서 즐겁고, 행복하게 살겠다”며 “후회 없는 인생을 제주도에서 누리겠다”고 환하게 웃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