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민과 함께하는 인문학 ⑥제주해녀
척박한 환경서 밭일·물질 동시에 ‘강인한 여성’
나는 해녀의 딸 “숨비소리로 토해낸 일생 존경”

앉아서 세계를 여행하고 몇 번의 손가락 터치로 원하는 음식이 식탁 앞에 와 있는 시대다. 편리하고 풍요로워진 생활 속에서도 무엇인지 모를 헛헛함이 존재한다. ‘풍요속 결핍’, 인문학적 사유와 따뜻한 교감이 필요하다. 제주창조신화의 주인공 설문대할망, 얼기설기 쌓아 태풍에도 끄떡없는 돌담 등 제주 곳곳에는 선인들의 지혜와 그들이 남긴 메시지가 고스란히 남았다. ㈜제주매일은 도민 모두가 행복한 문화·복지도시 실현을 위해 제주의 역사와 제주어, 제주학교의 역사 등 인문학 활성화사업 프로그램으로 사람과 사람이 만나 소통하면서 삶을 나누고 배움으로 이어가고 있다. 각 분야 전문가들이 전하는 제주인문학을 지면에 소개해 독자들과 더 오래, 더 깊이 공유한고자 한다. [편집자주]
고혜영 시인
고혜영 시인

아흔다섯의 어머니는 최근 “자식들에게 공 갚아야 되키여!”라는 말을 자주 하신다.

“최근 움직임이 불편해지면서 자식 집에 며칠씩 머무는 시간이 많아지자 생각도 정리되시는 걸까?”

물질해서 모은 돈이 있으신지 예금해둔 돈이 만기되면 정신이 맑을 때 조금씩이라도 공을 갚겠다는 것이다. 또한, 씻겨줘서 고맙다고 5만원, 때 챙겨줘서 고맙다고 5만원, 병원 다닐때나 물리치료 가실 때 곱게 단장하고 다니시라고 마련해 준 파마, 모자, 신발 등 사준 거 갚는다고 하면서 지갑을 열고 계시다.

그 돈은 평생 해녀로 물질해서 모은 돈이다. 자신의 명의로 일찌감치 통장을 개설해서 꼬박꼬박 안 먹고 안 입고 저축하며 평생 모아온 생명줄이라는 것을 자식들은 다 안다.

해녀 어머니는 열다섯에 물질해서 여든다섯에 물질을 은퇴하셨다. 70년을 해녀로 사신 것이다. 마을에서 80세에 물질을 그만두시라고 통고를 받은 날, 어머니가 흐렁흐렁 바다처럼 우시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나 또한 30년 직장을 퇴직하고 회한에 쌓여 힘들었던 날들이 있었던 터라 어머니의 마음과 맞닿아 아팠다.

어머니의 노쇠한 몸에는 아직도 바다가 출렁인다. 기억이 점점 사라져 가는 요즘에도 물질 이야기만 나오면 “하이고 그때 이?” 하면서 눈망울은 또랑또랑 목소리는 카랑카랑 되살아난다. 해녀증을 무슨 완장인 양 몸에 품고 다니신다. 물질은 어머니의 자존심이자 자식 공부시키고 먹여 살릴 수 있는 희망의 줄이었다.

척박한 이 고장에 여자로서 돈이 나올 때라곤 몸을 갈아 넣어야 하는 밭일과 물질이었다. 육지 가면 돈 더 벌 수 있을까 해서 어머니는 육지 물질을 세 번이나 다녀왔다.

바다에서 물질을 하고 있는 해녀 

그래서 내가 태어난 곳은 부산 기장이다. 어머니는 물질해서 자식 다섯을 공부시켰다. 육지로 물질 나간 해녀 언니들은 타향살이에 먹을 것 입을 것 아끼면서 모은 돈으로 식구들 먹여 살린다고 고향으로 돈을 부쳤다.

그 돈으로 쓰러져가는 집을 새로 짓고 형제들을 공부시켰다. 지금 그 자식과 형제들, 그리고 대를 이어 자식들이 자라 사회의 중요한 자리에서 필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이는 해녀가 칠성판을 등에 지고 물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삶을 살아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시대에는 나라도 살림이 어려워 지금처럼 장학금 같은 정책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전문직여성클럽 제주지부는(제주BPW) 이러한 해녀들이 활동상을 전문직 여성으로서의 활동으로 부각하기 시작했다.

2014전문직여성세계대회를 기회로 제주도와 함께 홍보 활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2008년 멕시코 대회, 2011년 핀란드 대회 홍보 결과 2014제주에서 개최되는 세계대회에서 ‘제주해녀’를 주제로 섹션 하나를 마련하는 데 성공시켰다.

오랫동안 내려져 오면서도 맨몸으로 하는 작업 형태, 협동심, 절제력, 불턱에서의 소통, 자연에 대한 감사함, 무엇보다도 위험을 무릅쓰면서도 경제를 지탱해온 해녀들의 노력에서 강한 제주 여인의 전설을 실감하기에 충분했다.

또한 너른 바다로 나가 테왁 하나에 의지해 물속으로 들어가는 해녀를 보면서 같은 여자로서, 한 인간으로서, 생명으로서 감탄을 마다하지 않았다.

제주BPW는 세계대회가 끝나도 계속해서 불턱을 찾아다니며 해녀들이 삶의 애환을 녹취해 책으로 묶어냈다. 유네스코에서 위원 역할을 하는 BPW세계대회 회장과 지속적인 정보를 교환하면서 제주해녀문화가 2016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 목록에 등재되는 발판을 마련하는데 기여했다.

또한 2024년 유네스코 세미나에서는 4·3피해자이기도 한 어머니의 일생을, 오직 그 고통과 슬픔을 해녀 일을 하며 바닷속에서 숨비소리로 토해냈을, 이제 한 여자의 일생이 얼마 남지 않았으며, 마음속 깊이 묻어둔 아픔들을 어루만져 줘야 하겠다는 내용으로 발표를 한 바 있다.

나는 해녀의 딸이다. 샛바람이 불면 감태 올림이가 생각나고, 휘파람새가 울면 어머니의 숨비소리가 귓전을 맴돈다. 하얀 마늘 꽃만 피어도 “들라~!들라~!” 하얀 속곳 입고 미역해치 나가는 해녀로 느껴진다.

최근 해녀에 대해 혜택도 많이 좋아졌다. 그래도 어머니는 심장병을 얻었고 손에 뇌선을 놓지 않으신다. 어서 걸어지면 근처 옥자 언니네 성게 까줄 마음에 벌써 마음은 현직 해녀로 돌아가 있다. 어머니가 자식에게 갚으시겠다는 그 공을 해녀의 자식이 어머니를 잘 돌보는 일로 보답할 것이다. 오늘은 내가 어릴 적 제구실로 아팠을 때 해준 것처럼 흰죽에 옥돔 구워 어머니께 드려야겠다. 제주경제에 뒷받침이 됐던 해녀들이 공을 많이 알아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 고혜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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