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보난 좋아마씸’ 2025 제주 한달살이 ⑩ 고병정씨
인간적인 관계와 지역의 따뜻함 속에서 시작된 창작의 영감
제주는 관광지가 아니라 ‘삶의 무대’…콘텐츠 제작자의 한 달 체류기
제주시 한달살이를 경험한 콘텐츠 제작자 고병정씨는 짧지만 밀도있는 시간을 통해 “제주는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라 새로운 삶의 무대”라고 강조했다. 문화자원에 대한 연구와 AI기술을 접목하려는 관심으로 제주를 찾은 그는 이번 한달살이를 통해 제주의 매력과 생활상의 차이를 몸소 체감했다.
4년간 교육과 콘텐츠 제작 활동을 이어오던 고씨는 최근 AI 기술을 활용해 문화자원을 담아내는 방식에 주목했다. “AI로 우리 문화자원을 어떻게 표현할까 늘 고민했어요. 그 와중에 제주가 가진 스토리 자원에 눈길이 갔죠. 원래 제주는 단순한 휴양지가 아니라 해석할 거리가 풍부한 문화 관광지잖아요. 한 달쯤 이곳에 살아보면서 직접 경험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는 그렇게 우연히 제주 한달살이에 참여하게 됐고 한두 달간의 생활을 통해 도시와는 다른 섬의 리듬을 배웠다. “서울에서는 쫓기듯 살았는데, 여기서는 산책을 하고 바닷길을 걷고 주민들과 인사하며 섬의 느린 템포에 몸을 맞출 수 있었죠.”
고씨가 제주에 도착해 가장 먼저 향한 곳은 박물관이었다. 제주에는 해녀박물관과 감귤박물관, 자연사박물관 등 다른 지역에는 없는 특색있는 전시 공간이 많다. “박물관이 단순히 역사를 대변하지 않아도 어떤 콘셉트로 만들어졌는지를 보면 그 지역이 지닌 사고방식을 읽을 수 있습니다. 특히 해녀와 감귤을 다루는 박물관은 제주만이 가진 고유함을 담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박물관 외에도 고씨는 섬을 한 바퀴 돌며 성산과 애월, 서귀포, 대정 등 제주 곳곳을 누볐다. 그 중 서귀포는 특별한 기억으로 남았다. “서귀포 바다는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풍경이었어요. 서해처럼 갯벌이 있을 것 같기도 한 이색적인 바다였죠. 또한 축제가 활발해 지역 문화에 활력이 넘쳤습니다.”
삶의 재미는 작은 경험에서 피어났다. 그의 기억 속에 가장 짙게 남은 장면은 감귤을 주워 먹으며 걸었던 산책이다. “길에 떨어진 감귤을 가져가라고 해서 주머니 가득 담아 먹으며 걸었어요. 감귤 껍질을 던지면서 걸었던 그 순간이 제주 생활의 한 장면으로 오래 남을 것 같습니다.”
사람과의 만남 역시 큰 선물처럼 다가왔다. 함덕의 한 숙박업소 사장이 연극인임을 알게 되면서 연극과 관련된 깊은 대화를 나눴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영상 작업 협의까지 이어졌다. 또 서귀포에서 만난 한 골프 선수 부부와는 막걸리를 곁들이며 소박한 대화를 나눴다. “제주 막걸리는 물이 좋아서 그런지 정말 맛있었어요. 대화 속에서 자연스럽게 친밀함이 싹텄습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생활상의 차이도 크게 체감했다. “제주는 습도가 높아 빨래가 잘 마르지 않더군요. 서쪽 지역에선 창문을 열면 가축 냄새가 그대로 들어왔고요. 처음엔 불편했지만 이내 익숙해졌습니다.”
풍습과 문화에서도 차이가 있었다. “살아보니 의식주뿐 아니라 생활양식의 세세한 차이가 제주의 ‘삶’을 만들어내는 요소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그는 과거 제주를 찾았을 때는 관광지로만 인식했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이번 한달살이로 시각이 완전히 바뀌었다. “관광지가 아니라 진짜 살기 좋은 공간, 나아가 독립된 작은 나라처럼 느껴졌습니다. 스스로 탐라국의 한 구성원이 된 듯했죠.”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는 제주에서 뿌리내린 생활을 통해 새로운 문화적 통찰을 얻었다. “대한민국 안에 있지만 다른 어디서도 볼 수 없는 독창적인 문화와 풍습이 공존하는 곳이 제주입니다. 앞으로 이 경험이 제 연구와 작업에 많은 영감을 줄 것 같습니다.”
이번 제주 체류는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삶의 속도를 늦추고 인간적인 관계를 되새기는 과정이자 AI와 문화자원을 융합하려는 탐구의 출발점이 됐다. “여기서 더 살다 보면 이야깃거리가 끝없이 생길 것 같아요. 제주는 저에게 새로운 생활의 이야기와 문화적 실험의 무대를 열어주었습니다.”
제주의 매력에 푹 빠진 고 씨는 결국 제주에 정착하기로 결심했다. 우연히 한라대학교 교수 임용 공고를 발견하고 지원해 합격한 것이다.
고 씨는 “현재는 시내 오피스텔에 머물고 있어 부모님을 모실 수 있는 집을 알아보고 있다”며 “이번 한달살이를 계기로 완전히 이주를 결심하게 됐다”고 말했다.
고 씨의 사례는 인구 유입을 위한 ‘제주 한달살이’ 정책의 긍정적 성과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로 꼽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우종희 기자

